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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대통령님''

'대통령'과 '대통령님'
2008.03.08 08:03
http://tong.nate.com/jc5115/43863273
'대통령'과 '대통령님'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는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첫 구절이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고 애타게 ‘님’을 찾는다. 송강의 가사와 만해의 시에 나오는 ‘님’은 현재의 국어 표기법대로라면 ‘임’으로 쓰는 것이 옳다.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임’이라고 하면 어쩐지 그런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님’이라고 해야 더 그럴듯해지는 느낌이다. 이 ‘님’이 직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명사 뒤에 붙으면, 상대를 높이는 뜻이된다는 게 국어사전의 설명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상당히 모자라는 처녀가 있었다. 매파의 농간으로 어떻게 짝이 지어져 시집을 가게 됐는데 부모의 걱정이 태산이다. 시부모와 남편 모시는 법이랑 살림하는 법을 일러주고 다시 일러줘도 그때만 “알았다니깐!” 해놓고 금방 까먹고 만다. 그렇지만 시부모에게 꼭 ‘님’자를 붙여서 부르라는 가르침은 시집가는 날까지 그치지 않는다. 알아 들었거나 못 알아 들었거나 시집을 가 새색씨가 된 처녀.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남편과 겸상을 한 시아버지 머리에 검불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친정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님’자 돌림으로 한 마디 하기를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네” 이랬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높임의 뜻을 갖는 접미사 ‘~님’으로 상징되는 불필요하고 과장된 경어체의 오·남용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직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명사는 그 자체에 이미 상대를 높여주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 굳이 ‘님’자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특히 ‘장(長)’자 돌림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에게 대놓고 ‘김 사장’ ‘이 사장’ 이렇게 부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사장인데 상무가 그런 식의 호칭을 사용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 나의 회사 사장을 언급할 때 ‘우리 회사 아무개 사장님’이라고 꼬박꼬박 ‘님’자를 붙이는가? 답은 뻔하다.
며칠 전, 청와대가 이명박 대통령 부부의 호칭을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로 통일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님’자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권위적이거나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소신에 따라 이런 결정을 했으나 ‘현장’에서는 ‘대통령님’ ‘여사님’으로 부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대통령에 대한 호칭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때부터 김영삼 대통령 때까지 ‘아무개 대통령 각하’였다.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국민을 상대로 대통령을 언급할 때도 그랬다.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 때에 이르러 ‘각하’라는 호칭이 권위주의의 상징이라 하여 ‘대통령님’을 공식 호칭으로 삼아 노무현 대통령 때까지 이어졌다.
이번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님’자까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전에는 대통령이 어떤 공식식장에 도착하면 “대통령 내외분(그 전에는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하고, 장내의 손님들은 ‘기립’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2월 25일 취임식 때는 이런 알림 방송이 없었고, 손님들은 당연히 기립하지 않아도 됐다. 3·1절 기념식 때는 “대통령 내외분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라는 방송은 있었으나 기립은 없었다.
청와대 사람들이나 정부 각 부처의 수장 등이 어떤 상대와 대통령을 3인칭으로 언급할 때는 뭐라고 할까? 그냥 ‘대통령’이라고 할까, 아니면 ‘대통령님’이라고 할까? 내부의 모든 보고용 서류에서는 ‘님’자를 빼기로 했다고 하고, ‘현장’에서는 ‘대통령님’이라고 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들의 자유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 “대통령 내외분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라는 문구를 놓고 보자. ‘대통령님’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한 마당에 ‘~께서’, ‘계십니다’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명박 대통령 내외분이 입장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대통령 내외분이 입장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권위적이거나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님’자를 뺀 것은 겉으로 아주 작은 변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상징성만은 작은 듯 작지 않다.
이돈관/연합뉴스 편집위원
게재일 : 2008.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