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 우리시대 관료의 모델 | ||||||
약자 편에서 민심을 보살핀 ‘관료의 모범’ | ||||||
[경기일보 2008-4-22] | ||||||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동쪽 대문인 창룡문 앞에서 경기대학교를 지나 수지로 나가는 길 왼쪽에 잘 단장된 묘역이 바로 심온 선생의 묘다. 흔히 묘(墓)도 문화유산인가 고민을 하는데 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자,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현재는 경기도 기념물 53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의 가문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보호하고 있다. 주변이 광교신도시 조성을 위한 택지 개발로 모두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심온 선생의 묘소는 그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온전히 남아있다. 심온 선생은 요즘 ‘대왕 세종’라는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충녕대군’의 장인이다. 즉 태종의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이며, 문종의 외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심덕부(沈德符)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일등공신이다. 평소 왜구 격파에 이름이 높았던 무장으로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지지하여 새로운 국가 창건의 주역이 된 심덕부는 청렴과 근면 그리고 온화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둘째 딸인 경선공주를 심덕부의 여섯째 아들인 심종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였다. 거기에 더하여 심온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인간으로서 복받은 인물이었던가! 그는 세종이 왕으로 등극했을 때 44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더 이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다. 심온은 대사헌으로서 조정을 투명한 권력구조로 제대로 만들고자 했다. 조선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왕의 정치 스승이라고 자부하던 하륜의 권력남용이 극심해지자 심온은 그를 탄핵하였다.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정몽주 살해를 지시하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국왕의 지위에 올랐던 냉혈한 태종도 감히 어찌할 수 없던 하륜을 탄핵했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감행하였고 태종은 하륜 탄핵을 기회로 의정부의 기능을 폐지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육조직계제로 전환하였다. 다시 말해 육조의 판서들이 업무를 직접 국왕에게 보고하고 이를 국왕이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는 육조의 판서들이 의정부 삼정승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이를 의정부에서 대부분 처리하고 국왕에게 통보만하는 의정부 서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였다. 태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심온은 새로운 개혁의 추진을 시도하였다. 바로 ‘노비변정도감’의 제조가 된 것이다. 당시 노비중 상당수가 고려 말에 권세가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새로운 국가가 되었음에도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노비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들을 다시 평민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너무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 일은 기존의 기득권층과 심각한 대립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청렴 강직의 표본인 심온으로 하여금 억울한 노비를 평민으로 환원시키는 국정과제를 수행하게 한 것이다. 노비변정도감 제조와 형조판서를 겸직한 심온은 노비 송사와 관련하여 노비에 대한 애정을 과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가 태종에게 올린 노비 신원에 대한 상소의 첫마디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아련하다. 그의 진정성이 깊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하늘이 백성을 낼 적에 본래부터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은 없었습니다.” 심온은 기득권층의 반대와 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소신대로 노비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양민을 절대적으로 늘려놓았다. 노비에서 해방된 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을 것인가! 그들은 춤을 추며 심온의 결단에 대한 칭송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그의 영광과 화려함도 오히려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막을 내려야 했다. 세종의 등극을 명에게 알리는 사은사로서의 업무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돌아온 심온은 국왕의 환영이 아닌 상왕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척 문제로 왕 노릇이 몹시도 힘들었던 태종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사돈인 심온을 영의정에 오르게 한지 몇 달 만에 역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심온은 11살에 무과에 급제한 인물로 평생을 무반으로 살아왔다. 그가 이조판서와 호조판서 등 문신의 역할도 하였지만 그는 아버지 심덕부의 영향을 받아 정통 무신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이 병권을 세종에게 주기 위하여 무관인 심온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의 심온에 대한 경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에…. 심온은 의주에서 붙잡혀 수원으로 귀양을 와서 상왕(태종)의 명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수원은 그의 아버지 심덕부가 젊은 날 수령으로 부임하여 입신양명의 발판을 마련한 장소인데, 이곳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심온 선생의 묘역에는 보기 힘든 문화재가 남아있다. 바로 세조의 조선초 그림과 글씨의 대가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묘비이다. 조그마한 백대리석의 묘비이지만 안평대군의 글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지금 대단히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세조가 왕으로 등극하여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쓴 글씨를 모두 없애라 하였는데, 차마 외조부의 묘비는 없앨 수 없어서 그냥 두었던 모양이다.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일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은퇴하여 조용히 여생을 살고자 했던 심온에게 역적의 누명이 씌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심온은 세종대부터 의심스런 옥사였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종 1년에 복권되어 안효공(安孝公)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역적에서 다시 공신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권력의 힘 때문에 때론 침묵할 수도 있지만 결코 진실을 숨겨두지는 않는다. 심온의 진실이 태종으로 인해 빛을 잃었지만 그의 손자였던 문종에 이르러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이다. 언제나 강직하고 청렴했던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던 심온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할 관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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