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오회연교(五晦筵敎)의 진실

오회연교(五晦筵敎)의 진실

정조대왕이 죽음 직전에 내린 교시 오회연교는 아직까지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1800년 5월 30일 그믐(晦)에 내린 교시라 해서 오회연교로 불리는 이날의 조치는 대단히 파격적인 내용으로, 그동안의 의리론에 입각한 탕평책으로 정파별로 안배하던 인사정책의 포기선언이었다.
오회연교에는 솔교(率敎·가르치고 따른다)와 교속(矯俗·나쁜 습속을 바로잡는다)이라는 그의 통치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두 단어가 들어있다. 스스로 군주와 선생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정조는 모든 신하와 백성의 어버이이며 나쁜 습속은 제거한다는 원칙론자였다. 당시 정국에서 가장 나쁜 습속은 당파에 얽매어 내용의 유무익을 떠나 무조건 상대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오회연교를 통해 정조는 더 이상 이러한 나쁜 습속을 용납하지 않겠으며 이제부터의 의리는 올바른 길을 제시한 자신을 따르는 것이고 앞으로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현할 인물들과 정치를 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미 그는 소수파인 소론을 대거 등용하는 인사를 발표했었다. 특히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는 판서와 참의를 모두 소론파로 임명했다. 물론 영조 때 궤멸되다시피 했던 소론의 복귀가 정조의 의도는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개혁을 주도할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사전 포석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오회연교에서 8년 주기의 재상임명을 언급하며 그 정당성을 역설했다. 남인 채제공, 노론 김종수, 소론 윤시동이 모두 8년 주기로 재상 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남인 차례였다. 정조는 이미 남인의 대표격인 이가환을 한성판윤으로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또한 동부승지를 사양하고 낙향한 정약용에게도 사람을 보내 6월 그믐 경연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취했고 천주학도 이승훈도 죄를 1등급 감해 경미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두 정조가 키운 남인의 차세대 주자들이었다. 결국 오회연교는 이들과 함께 갑자년(1804) 구상을 준비하고자 했던 정조의 복안이었다.
갑자년 구상은 정조가 세자의 나이 15세에 왕위를 넘기고 자신은 신축한 화성에 상왕으로 앉아 부친의 추증은 물론 한양천도까지를 포함한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한양에서의 개혁정치는 막강한 노론 등 기득권 세력으로 불가능했다. 이를 잘 알기에 정조는 화성 건설을 하면서 수원을 자급적 상업신도시로 준비시켰고 장용영 외영의 본부도 이곳에 두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오회연교는 대신들로부터 비난과 외면 그리고 항의를 들어야 했다. 자신이 키운 초계문신 출신의 이서구까지 노론의 신임 의리와 사림정치 준수를 요구했다. 아직 조정은 정조의 구상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실망한 정조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이즈음 종기가 발생했고 결국 치료과정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급박해진 정조가 꺼낸 카드가 외척 김조순의 적극적인 참여요청이었다. 이것이 후일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는 바람에 정조의 오점이 되었지만 진짜 의도는 외척중용이 아니라 그들의 힘을 빌려 다시금 오회연교를 실시할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비록 오회연교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실현되지 못했고 무리수였다는 비판까지 들어야 했지만 진짜 정조의 구상은 제대로 된 사람들을 등용해 진짜 백성을 위한 정치실현이 아니었을까. 오늘이라고 인재등용과 민본정치 구현의 오회연교가 필요치 않을런가 생각해 본다.
임형진/정조학교준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