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地圖를 엿보다 |
[경기일보 2009-9-1] |
구글을 시작으로 네이버, 다음 등 국내외 대표 포털사이트가 최근 선보인 서비스 중 하나가 ‘위성사진’이다. 지도와 함께 위성사진을 접목시켜 현장감 있게 지형지물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조선후기의 지도는 다양한 정보와 세련된 기법들이 가미됐다. 여기다 현대의 단출한 지도와 달리 회화적 아름다움까지 담고 있어 문화사적인 의미도 크다. 광주는 조선시대 4대 유수부로 서울인 도성을 감싸고 있는 요즘의 특별직할시 역할을 했다. 군사·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광주와 남한산성이 옛지도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 경기도와 고지도 예나 지금이나 경기도는 서울(한양)을 감싸고 있다. 도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역할 뿐 아니라 도성의 배후지역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주요 생산공급처이자 거주공간, 교육공간이었다. 그래서 낙향한 실학자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 도성과 인접한 경기도이고 이로 인해 ‘경기실학’이 태동했다. 조선시대는 경기도의 도지도는 물론 개성·강화·수원·광주 등 4대 유수부 단독 지도를 빈번히 제작됐다. 조선후기에는 경기도 관내 군현(읍지도)지도도 활발히 제작됐다. 현존하는 경기도 군현지도는 대부분 영·정조시대 이후에 제작됐다. 대표적인 지도가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광여도’다. 이들 지도는 군현지도와 함께 세계지도, 관방지도, 전도, 도별도 등이 총망라된 종합 지도책이었다. 고지도는 아름다움을 겸비한 한 폭의 한국화를 연상시킨다. 일명 ‘회화식 지도’다. 이는 중국·일본지도와 다른 특색으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지도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지도제작 전문가 그룹과 화가 그룹, 풍수지리가, 계산에 밝은 측량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화공들이 그린 산맥은 산을 연첩하여 그린 결과, 그림을 보듯 자연스런 구성과 구도를 연출했다. 현존하는 경기도 고지도는 군현지도가 수록된 지도첩(책) 18종, 낱장 군현지도 45종, 산성지도 등 특수지도가 14종이다. ● 너른 광주를 담은 해동지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여의도에 이르는 한강이 푸른색 물줄기로 그려져 있고, 광주부 내륙에는 실핏줄 같이 세밀한 물길이 이어져 있다. 지도는 한강이 흘러가는 서쪽이 상단이며, 산지는 독립된 형태로 그렸는데, 중앙의 남한산성을 제외한 주벽지역에 고루 분포한다. 산지보다는 물줄기를 세밀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한강 물줄기는 동쪽 두물머리에서 바다로 이어진다. 수운이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송파진, 삼전도, 광진, 용진 등 한강변 나루의 이름과 창고가 표시돼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대로상에는 역원이 배치돼 있으며 사근천주막, 삼가주막, 가일주막, 갈산주막 등 주막 지명도 눈길을 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상업유통의 핵심지역임을 알려 준다. 지도 가운데 위치한 남한산성은 비교적 자세히 그렸다. 암문과 포루 옹성, 신성, 장대 등의 모습과 산성 내부의 행궁을 비롯한 관청, 사찰, 창고 등의 명칭과 함께 그렸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강 주변의 왕자와 공주를 비롯한 명사들의 묘소를 기록한 것이다. 성종의 능인 선릉을 비롯해 명안공주기, 동양위묘, 구흥군묘, 안현군묘 등을 담았는데, 유교사회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해동지도는 18세기 중엽 제작했으며, 지도 여백에는 호구, 곡물, 군병, 산천, 고적, 역원, 서원, 토산 등의 항목을 넣었고, 읍치였던 남한산성을 주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그렸다. ● 실측지도의 교과서 조선지도 한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빠져나가며, 고랑(古浪)은 지금의 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한강의 지류인 탄천(炭川), 천호천(穿呼川), 소천(小川)과 강변에는 다수의 나루와 누대가 표시돼 있다. 특히 안산과 남양만(화성)을 사이에 두고 서해바다까지 이어진 당시 광주부의 광활한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북쪽에 위치한 서원은 구암서원(龜岩書院)이며, 서쪽 서원은 수곡서원(秀谷書院)이다. 또한 봉안역, 덕풍역, 판교역, 추현역 등 많은 역이 표시돼 있다. 광주 경안역은 7개의 속역(屬驛)을 거느린 찰방역(察訪驛)이었다. 조선지도는 1750년에서 1768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 7도의 군현을 순서대로 묶었다. 위치·거리·방향 등의 정보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각 지도는 동일한 축척의 20리 방안(方案) 위에 그렸다. 따라서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제 면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남한산성은 둥근 성곽형태만 보일 뿐 자세한 성곽 형태나 내부 구조물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 최고의 관방지도 남한산성 군사기지를 그린 영진(營鎭)이나 관아의 배치를 담은 관아도, 국방을 위한 산성지도 등은 일종의 ‘특수지도’다. 특정한 목적을 지닌 만큼 세밀하게 그렸으며, 당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남한산성은 한양을 보호하는 주요 거점인 만큼 여러 종류의 지도가 남아 있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18세기 중반 해동지도는 47.5×60㎝로 남한산성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의 산세와 물길을 세밀히 묘사했다. 산지는 연이은 연맥식이며 시점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원성을 비롯 동림신성과 옹성, 장대 등의 성곽 구조가 잘 표현돼 있고, 행궁과 인화관, 연병관 등의 관아 건물과 각종 창고와 사찰, 백제의 온조왕을 묘신 현재의 숭렬전을 온왕묘라 표시했다. 산성북쪽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부대가 매복했던 곳을 비롯해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는 곳,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곳 등을 지형지세 설명과 더불어 자세히 표시했다. 동국여도의 남한산성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출하다. 동서남북의 성문과 수어장대, 동문 근처의 옹성을 담았고,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비를 그림으로 그렸다. 또 규장각 소장의 남한지도는 개원사 등 10개의 사찰과 4개의 군사지휘소를 표시하는 깃발이 힘차게 그려져 있고, 지도 하단에는 수어청 소속 전영, 좌영, 중영, 우영, 후영의 담당구역을 명기한 것이 이채롭다. 이밖에 현재의 남한산성의 형태와 가장 근접한 영남대 소장 지도는 행궁의 상궐과 하궐, 입구인 한남루를 상세히 그렸다. 또 연못인 지수당의 형태와 암문의 위치도 표시했다. 남한산성 지도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다. 어쩌면 고지도에 존재했던 길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남한산성과 광주의 지도를 그렸을 옛 선인들의 수고로움이 오늘의 문명을 나았을 것이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인터뷰/ 오일환 혜정박물관 학예실장 “남한산성은 한성을 보호하는 5악 중 하나였고, 그 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 오일환 혜정박물관 학예실장은 풍수지리상으로 남한산이 핵심 거점임을 감안할 때 광주부의 비중이 컷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평지성이 아닌 산성국가입니다. 위급할 때 사용했던 산성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도는 필수적인 도구였죠.” 산성국가에서 지도는 어떻게 제작됐을까. 오 실장은 우리나라 고지도는 전제 왕권시대 상황에서 집단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서양은 인쇄를 한후 제작자나 제작연도가 정확하지만, 동양은 국가기관인 비변사 등에서 국방관련 지도를 그렸고, 대부분 화원들과 일종의 지리학자가 합세해 그렸어요. 민간인이 그린 것은 상대적으로 정확성이 떨어지죠.” 혜정박물관에는 최근 보물로 지정된 경기도 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상세히 표기한 남한산성을 만날 수 있다. “1770년대 영조가 각 지역의 지도를 올리라는 왕명을 내렸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저희 박물관이 소장한 지도는 색감이 좋고, 산계와 하계, 역참 등이 정확히 표시돼 있어 이 지도가 그 때의 지도 아닌가 추정하고 있어요.” 이 지도에서 남한산성은 북한산성보다 10배 이상 크게 그렸으며, 성곽과 옹성, 남격대 그리고 주요 건물들을 담고 있다. 혜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기도 지도와 강원도, 함경북도 지도 등 3점은 지난 2월 보물로 지정됐다. 이 지도는 1770년 신경준이 주도해 제작한 ‘팔도도’ 계통의 채색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자연적 요소와 지명, 왕궁 등의 인문적 요소가 정교하고 상세히 묘사돼 있어 미학적 가치가 높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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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09-9-1] |
구글을 시작으로 네이버, 다음 등 국내외 대표 포털사이트가 최근 선보인 서비스 중 하나가 ‘위성사진’이다. 지도와 함께 위성사진을 접목시켜 현장감 있게 지형지물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조선후기의 지도는 다양한 정보와 세련된 기법들이 가미됐다. 여기다 현대의 단출한 지도와 달리 회화적 아름다움까지 담고 있어 문화사적인 의미도 크다. 광주는 조선시대 4대 유수부로 서울인 도성을 감싸고 있는 요즘의 특별직할시 역할을 했다. 군사·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광주와 남한산성이 옛지도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 경기도와 고지도 예나 지금이나 경기도는 서울(한양)을 감싸고 있다. 도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역할 뿐 아니라 도성의 배후지역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주요 생산공급처이자 거주공간, 교육공간이었다. 그래서 낙향한 실학자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 도성과 인접한 경기도이고 이로 인해 ‘경기실학’이 태동했다. 조선시대는 경기도의 도지도는 물론 개성·강화·수원·광주 등 4대 유수부 단독 지도를 빈번히 제작됐다. 조선후기에는 경기도 관내 군현(읍지도)지도도 활발히 제작됐다. 현존하는 경기도 군현지도는 대부분 영·정조시대 이후에 제작됐다. 대표적인 지도가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광여도’다. 이들 지도는 군현지도와 함께 세계지도, 관방지도, 전도, 도별도 등이 총망라된 종합 지도책이었다. 고지도는 아름다움을 겸비한 한 폭의 한국화를 연상시킨다. 일명 ‘회화식 지도’다. 이는 중국·일본지도와 다른 특색으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지도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지도제작 전문가 그룹과 화가 그룹, 풍수지리가, 계산에 밝은 측량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화공들이 그린 산맥은 산을 연첩하여 그린 결과, 그림을 보듯 자연스런 구성과 구도를 연출했다. 현존하는 경기도 고지도는 군현지도가 수록된 지도첩(책) 18종, 낱장 군현지도 45종, 산성지도 등 특수지도가 14종이다. ● 너른 광주를 담은 해동지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여의도에 이르는 한강이 푸른색 물줄기로 그려져 있고, 광주부 내륙에는 실핏줄 같이 세밀한 물길이 이어져 있다. 지도는 한강이 흘러가는 서쪽이 상단이며, 산지는 독립된 형태로 그렸는데, 중앙의 남한산성을 제외한 주벽지역에 고루 분포한다. 산지보다는 물줄기를 세밀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한강 물줄기는 동쪽 두물머리에서 바다로 이어진다. 수운이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송파진, 삼전도, 광진, 용진 등 한강변 나루의 이름과 창고가 표시돼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대로상에는 역원이 배치돼 있으며 사근천주막, 삼가주막, 가일주막, 갈산주막 등 주막 지명도 눈길을 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상업유통의 핵심지역임을 알려 준다. 지도 가운데 위치한 남한산성은 비교적 자세히 그렸다. 암문과 포루 옹성, 신성, 장대 등의 모습과 산성 내부의 행궁을 비롯한 관청, 사찰, 창고 등의 명칭과 함께 그렸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강 주변의 왕자와 공주를 비롯한 명사들의 묘소를 기록한 것이다. 성종의 능인 선릉을 비롯해 명안공주기, 동양위묘, 구흥군묘, 안현군묘 등을 담았는데, 유교사회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해동지도는 18세기 중엽 제작했으며, 지도 여백에는 호구, 곡물, 군병, 산천, 고적, 역원, 서원, 토산 등의 항목을 넣었고, 읍치였던 남한산성을 주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그렸다. ● 실측지도의 교과서 조선지도 한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빠져나가며, 고랑(古浪)은 지금의 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한강의 지류인 탄천(炭川), 천호천(穿呼川), 소천(小川)과 강변에는 다수의 나루와 누대가 표시돼 있다. 특히 안산과 남양만(화성)을 사이에 두고 서해바다까지 이어진 당시 광주부의 광활한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북쪽에 위치한 서원은 구암서원(龜岩書院)이며, 서쪽 서원은 수곡서원(秀谷書院)이다. 또한 봉안역, 덕풍역, 판교역, 추현역 등 많은 역이 표시돼 있다. 광주 경안역은 7개의 속역(屬驛)을 거느린 찰방역(察訪驛)이었다. 조선지도는 1750년에서 1768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 7도의 군현을 순서대로 묶었다. 위치·거리·방향 등의 정보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각 지도는 동일한 축척의 20리 방안(方案) 위에 그렸다. 따라서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제 면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남한산성은 둥근 성곽형태만 보일 뿐 자세한 성곽 형태나 내부 구조물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 최고의 관방지도 남한산성 군사기지를 그린 영진(營鎭)이나 관아의 배치를 담은 관아도, 국방을 위한 산성지도 등은 일종의 ‘특수지도’다. 특정한 목적을 지닌 만큼 세밀하게 그렸으며, 당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남한산성은 한양을 보호하는 주요 거점인 만큼 여러 종류의 지도가 남아 있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18세기 중반 해동지도는 47.5×60㎝로 남한산성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의 산세와 물길을 세밀히 묘사했다. 산지는 연이은 연맥식이며 시점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원성을 비롯 동림신성과 옹성, 장대 등의 성곽 구조가 잘 표현돼 있고, 행궁과 인화관, 연병관 등의 관아 건물과 각종 창고와 사찰, 백제의 온조왕을 묘신 현재의 숭렬전을 온왕묘라 표시했다. 산성북쪽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부대가 매복했던 곳을 비롯해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는 곳,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곳 등을 지형지세 설명과 더불어 자세히 표시했다. 동국여도의 남한산성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출하다. 동서남북의 성문과 수어장대, 동문 근처의 옹성을 담았고,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비를 그림으로 그렸다. 또 규장각 소장의 남한지도는 개원사 등 10개의 사찰과 4개의 군사지휘소를 표시하는 깃발이 힘차게 그려져 있고, 지도 하단에는 수어청 소속 전영, 좌영, 중영, 우영, 후영의 담당구역을 명기한 것이 이채롭다. 이밖에 현재의 남한산성의 형태와 가장 근접한 영남대 소장 지도는 행궁의 상궐과 하궐, 입구인 한남루를 상세히 그렸다. 또 연못인 지수당의 형태와 암문의 위치도 표시했다. 남한산성 지도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다. 어쩌면 고지도에 존재했던 길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남한산성과 광주의 지도를 그렸을 옛 선인들의 수고로움이 오늘의 문명을 나았을 것이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인터뷰/ 오일환 혜정박물관 학예실장 “남한산성은 한성을 보호하는 5악 중 하나였고, 그 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 오일환 혜정박물관 학예실장은 풍수지리상으로 남한산이 핵심 거점임을 감안할 때 광주부의 비중이 컷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평지성이 아닌 산성국가입니다. 위급할 때 사용했던 산성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도는 필수적인 도구였죠.” 산성국가에서 지도는 어떻게 제작됐을까. 오 실장은 우리나라 고지도는 전제 왕권시대 상황에서 집단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서양은 인쇄를 한후 제작자나 제작연도가 정확하지만, 동양은 국가기관인 비변사 등에서 국방관련 지도를 그렸고, 대부분 화원들과 일종의 지리학자가 합세해 그렸어요. 민간인이 그린 것은 상대적으로 정확성이 떨어지죠.” 혜정박물관에는 최근 보물로 지정된 경기도 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상세히 표기한 남한산성을 만날 수 있다. “1770년대 영조가 각 지역의 지도를 올리라는 왕명을 내렸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저희 박물관이 소장한 지도는 색감이 좋고, 산계와 하계, 역참 등이 정확히 표시돼 있어 이 지도가 그 때의 지도 아닌가 추정하고 있어요.” 이 지도에서 남한산성은 북한산성보다 10배 이상 크게 그렸으며, 성곽과 옹성, 남격대 그리고 주요 건물들을 담고 있다. 혜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기도 지도와 강원도, 함경북도 지도 등 3점은 지난 2월 보물로 지정됐다. 이 지도는 1770년 신경준이 주도해 제작한 ‘팔도도’ 계통의 채색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자연적 요소와 지명, 왕궁 등의 인문적 요소가 정교하고 상세히 묘사돼 있어 미학적 가치가 높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