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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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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국왕들 세종⑥ 용인술

인재를 중시한 세종은 과거 자신의 정적까지도 모두 포용하고 등용했다. 부왕 태종이 피의 숙청으로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 모두를 포용할 수 있었던 배경이지만 세종이 정치보복을 생각했다면 여러 명이 다칠 수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 일가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유정현(柳廷顯)과 박은(朴誾)이었다. ‘심온 옥사’가 발생했던 세종 즉위년(1418) 11월 유정현은 영돈녕(領敦寧), 박은은 좌의정이었다. 심온의 옥사 당시 태종이 박은에게 “나의 여생은 많지 않고 본 것은 많으므로 이런 대간(大姦)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태종은 심온이 훗날 왕권을 위협할까 두려워 제거하려 하였다.

심온·심정형제의 가장 큰 혐의는 군권(軍權)을 상왕 태종으로부터 세종에게 돌리려 했다는 것이었다. 심온의 동생 동지총제 심정은 두 차례의 압슬형 끝에 “형(심온)의 집에 갔더니 (형이) 군사(軍事)는 당연히 한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고 자백했다. “이른바 한곳이란 주상전(主上殿:세종)을 뜻한다”는 '세종실록' 사관의 말처럼 군권을 세종에게 돌리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심온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물증이라고는 가혹한 고문에 의한 자백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온 일가를 제거해야 한다고 태종을 부추긴 인물이 박은과 유정현이었다. 심온 제거를 결심한 인물은 태종이지만 그는 최소한 심온과 연루자들의 대질심문을 실시하려고 했다.

“괴수(魁首) 심온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두었다가 대질(對質)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심과 천의(天意)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대질심문으로 진실을 캐자는 태종의 말에 박은은 즉각 사형을 주장했다. “심온이 범한 죄는 사실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대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겨두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반역을 모의한 자는 주모자와 종범을 분간하지 않는 법이오니,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대질심문을 하지 말고 연루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박은은 “심온이 말한 ‘한곳’이 어찌 우리 상왕전(上王殿)을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주상전을 가리킨 것이오니 그 뜻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유정현도 “박습 등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하루라도 형을 늦출 수 없습니다”라고 가세했다.

'연려실기술'이 '박습유사(朴習遺事)'를 인용해 “박은과 유정현이 애초부터 심온과 더불어 권세를 다투어 서로 좋지 못하더니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여 아뢰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심온 죽이기에 나섰다. 둘은 이때 태종이 세종의 폐위를 결심한 것으로 여겼거나 최소한 세종비 공비(恭妃:소헌왕후) 심씨는 폐위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둘의 예상과는 달리 태종은 세종은커녕 왕비 폐위도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은 태종은 세종 즉위년(1418) 11월 28일 유정현과 박은 등을 불러 말했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그 딸이 후비(后妃)가 된 일은 옛날에도 있었는데, 하물며 형률(刑律)에도 연좌한다는 명문(明文)이 없다. 내가 이미 공비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 말라고 명했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박은 등은 태종에게 “궁중(宮中)이 적막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세종실록'은 “그 뜻은 대개 중궁(中宮)을 마땅히 폐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인데 상왕도 그 뜻을 알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박은은 심지어 병조 당상관에게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죄 없는 심온을 죽였으니 그 딸을 왕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종은 “'서경(書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閔氏:원경왕후 민씨)의 일도 또한 불충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라고 공비를 옹호했다. 태종의 이 말에 대해 '세종실록'은 ‘유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박습유사'는 “유정현·박은·조말생 등이 여러 차례 왕비를 폐하기를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된 심온은 수원으로 압송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기재잡기'는 심온이 죽을 때 “대대로 박씨와는 서로 혼인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면서 ‘이는 박은이 자기의 죽음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깊이 한스럽게 여겼던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박습유사'는 “유정현이 심온의 아내 안씨(安氏)를 천안(賤案)에 넣기를 청했으므로 의정부의 여종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세종의 장모 안씨는 물론 그 자녀들까지 천인들의 명부인 천안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 강상인(姜尙仁)이 거열(車裂)당하기 위해 수레에 올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추초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다”라고 크게 부르짖었다는 기록처럼 무리한 옥사였다. 갓 즉위한 세종의 권위는 이 사건으로 결정적 상처를 입었다. 장인이 자신에게 군권을 돌리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하고 장모는 천인으로 떨어졌으니 아무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의 장모 안씨 등이 세종 8년(1426) 천안에서 빠지고 문종 1년(1451) 심온의 관직도 다시 회복된 것처럼 심온의 옥사가 억울했다는 것은 공지(公知)의 사실이었다.

태종 사후 세종은 유정현과 박은에게 자신을 능멸하고 죄 없는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일가를 주륙 낸 혐의로 보복할 수 있었으나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종이 살아 있을 때인 세종 3년(1421) 병으로 좌의정을 사퇴한 후 이듬해 세상을 떠난 박은은 그렇다고 쳐도, 유정현은 태종 사후까지 생존했으나 세종은 그가 세상을 떠나는 재위 8년(1426)까지 계속 정승의 자리에 두었다. 세종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망신 준 박은과 유정현 등에게 유감이 있었겠지만 태종 사후에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정치보복은 피해자가 집권 후에 가해자를 용서할 때 비로소 단절된다는 사례를 실천한 셈이었다.

세종은 정치보복은커녕 자신에게 반대한 인물을 더욱 크게 중용하기도 했다. 황희(黃喜)가 그런 사례였다. 황희는 태종 16년(1416) 세자 양녕의 비행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그때 선공부정(繕工副正) 구종수(具宗秀)와 악공(樂工) 이오방(李五方) 등이 대나무다리(竹橋)를 만들어 궁중 담을 넘어서 세자 양녕과 술 마시고 놀거나 세자를 구종수의 집으로 맞아들여 여색을 즐기고 양녕이 좋아하는 매(鷹子)를 바쳤다가 태종에게 발각되었다. 태종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황희에게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 묻자 “구종수가 한 짓은 매나 개의 일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축소하면서 “세자는 어립니다. 세자는 어립니다”라고 두 번씩이나 양녕을 옹호했다.

태종은 2년 후인 태종 18년(1418) 세자를 교체하면서 그때 일을 다시 물었는데, 황희는 “ ‘세자가 어리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기억나지만 매와 개에 대한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그 당시 병조판서 이원(李原)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황희의 거짓말이 명백해졌고 군부를 속였다는 혐의로 대간과 형조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전리(田里)로 돌아가라고 가볍게 처벌했으나 탄핵이 잇따르자 본향(本鄕)인 남원(南原)에 안치(安置)했다. 양녕의 비행을 옹호하다가 쫓겨난 황희는 세종의 즉위와 함께 끝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재위 4년(1422) 2월 황희를 남원에서 불러올렸다. 대간에서 다시 황희의 처벌을 주창하는 와중에 세종은 그해 10월 의정부 참찬을 제수했다. 이때는 태종이 사망한 지 5개월이 지난 후였으므로 세종의 의지였다.

그 후 세종은 황희를 관찰사, 판서, 좌의정 등 요직에 등용하다가 재위 13년(1431)에 영의정 부사로 승진시킨 후 세종 31년(1449) 스스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태종은 재위 14년(1414) 의정부에서 먼저 육조(六曹)의 업무를 심의한 후 국왕에게 재가를 요청하는 의정부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했다. 세종은 재위 18년(1436) 의정부서사제를 부활해 황희에게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인물에게 왕권의 상당 부분을 넘긴 것이니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세종 특유의 인재 활용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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