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에게 속은 23가지 1/2/3/4_ 김정호 자유기업원장_ⓒ (주)이비뉴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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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경쟁에서 보호 못받은 조선산업 세계최정상은 어떻게 설명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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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글에는 정부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깔려 있다. 보호주의 정책에 대한 신뢰, 복지제도와 공기업에 대한 신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 교수의 견해가 대부분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는 보호무역주의 옹호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장하준에 의하면 선진국들은 대부분 발전 초기 단계에 산업을 보호했고, 그것이 선진국의 된 원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에게 보호 장벽을 폐지하고 개방을 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선진국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자유무역을 지지하지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보호주의 정책 역시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에 나타난 결과가 어떠한지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보호를 받은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성공을 거뒀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증 분석이 그렇듯이 이 일 역시 만만치가 않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은 어떤 형식으로는 보호를 받았다. 농업이든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보호를 받지 않은 산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보호의 정도를 가지고 비교를 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보호를 심하게 받은 산업과 덜 받은 산업을 비교해 본다면 보호와 자유무역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 중에서 아마도 가장 보호를 덜 받은 산업은 대중가요와 조선 산업일 것이다. 대중 가요의 경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일본 가요를 금지하는 정도에서만 보호를 받았지만 가요의 대세라고 할 수 있었던 서양 팝송으로부터는 거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싼 값에 팝송의 무단복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가요는 불이익을 받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대형유조선 제조산업의 경우도 보호를 받지 못한 산업이다. 아니, 국내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라는 것이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장 교수의 논리대로 한다면 이 두 산업은 이 땅에서 사라졌어야 한다. 그야말로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던 상태에서 미국 일본 독일 같은 선진국 경쟁자들과의 무한 경쟁에 노출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흥미롭게도 조선산업은 한국의 어떤 산업보다 먼저 세계 최정상에 올랐고, 대중가요 역시 K-Pop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본과 중국을 넘어 유럽을 달리고 있다. 가장 덜 보호받은 산업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두 산업의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보호받지 못한 현대중공업의 성공
한국에서 대형 유조선을 건조하는 일은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울산조선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 아직도 TV 광고에 출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울산조선소를 만들던 에피소드이다. 당시 장하준 교수에게 물었다면 조선산업은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고 답했을 것이다. 용기와 열정 말고는 대형선박을 만들기 위한 기술도 자본도 인력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 바로 당시 한국 조선업이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 역시 매우 큰 산업이니 보호의 대상으로는 보호를 해야 한다면 조선업이 최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대울산조선소는 국제경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보호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울산조선소를 만들던 당시 한국에서 건조되던 선박의 최대 규모는 1만 5000톤이었다. 그 보다 큰 선박은 국내에서는 살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주영이 도전한 선박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70만톤급의 대형유조선이었다. 당연히 현대울산조선소는 처음부터 모든 제품을 해외 시장에 팔아야 했다.
실제로 현대조선소의 첫 고객은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였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자세한 상황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수많은 도전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일본과 스웨덴 등의 기업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출발부터 보호없이 치열한 국제경쟁에 노출되었던 현대중공업이 가장 단시간 내에 이룬 쾌거이다. 뒤를 이어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다른 조선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조선산업은 보호 없이 세계최고가 된 것이다.
대중가요의 무한경쟁이 K-pop을 만들어냈다
K-POP 역시 보호 없이 성장한 대표적 산업이다. 그리고 그 성공은 모두의 기대를 완전히 뛰어넘고 있다. 지난 30년간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들이 한국의 얼굴 노릇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K-POP이 우리의 얼굴이 될 것이다. 공정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2011년 4월 보도한 내용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젊은 한류팬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가요´, ´드라마´ 등으로 대표된다. K-POP을 주도하고 있는 카라, 슈퍼주니어 등이 아시아 전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고 이들이 바로 ´한류´(Korean Wave)라고 불리는 문화현상을 이끌고 있다. (중략) 지난 수십년간의 한국 경제의 성공요인을 재벌(Big ´Chaebol´) 중심의 기업문화였지만 (중략)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한류´가 되어 가고 있다.
필자 같은 사람에게 한국 대중가요의 이같은 성공은 삼성이나 현대의 성공만큼이나 뜻밖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이 1975년이었는데, 그 때만해도 대학생들이 듣던 노래는 대개 외국의 팝송이었다. 나 자신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CCR의 카튼필드 같은 노래들에 빠져 있었다. 젊은이들의 시간인 심야시간대에 라디어에서 틀어주는 음악은 태반이 외국 팝송이었다. 심야방송의 DJ들은 모두 팝송전문가들이었고 나이트 클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요에 대한 외국 팝송의 경쟁력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다.
그런데도 우리 가요에 대한 보호막은 거의 없었다. 일본 대중 가요를 금지하기는 했지만 그리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 허용했더라도 깊은 반한 감정 때문에 어차피 일본음악을 많이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음악의 강자인 서양 팝송으로부터 한국 가요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없었다. 음반을 놓고 보면 오히려 국내 가수와 가요들이 역차별을 받는 상황이었다. 장하준 교수의 책에도 나오듯이 국내가수의 음반은 몇천원씩을 내고 사야하는 반면 팝송 음반은 불법복제된 소위 ‘빽판’을 500원에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의 대중가요 가수와 작곡자들과 연주자들은 산업이라고 불릴 수도 없을 정도의 ‘유치’산업일 때부터 (일본 가요를 제외하면) 외국 팝송과의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바로 우리의 대중가요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중 음악가들은 경쟁 때문에 죽지 않았다.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와 송창식은 팝송을 흉내내면서 우리의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8군 무대에서 팝송을 노래 부르던 패티김과 신중현과 윤복희가 대중가요를 부르면서 우리 가요의 수준을 높여갔다. 조용필과 서태지와 HOT는 비틀즈, 에어 서플라이, MC 해머 같은 외국 가수들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한국 소비자와 세계 음악팬의 선택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팝송과의 경쟁은, 경쟁인 동시에 배움이면서 발전의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이수만이라는 기획자이자 모험가의 출현은 중요하다. SM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둔 가요와 가수의 생산에 나선다. 그 첫 번째 성공작이 HOT였다. HOT는 포스터까지 불티나게 팔려서 외국 가수들의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던 우리나라 소녀들의 방을 그들의 사진이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제 우리의 젊은이들은 팝송보다 K-POP을 더 즐겨듣는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와 카라를 보기에도 바빠서 외국 가요를 들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프로인 심야방송에는 거의 외국노래들이 나오지 않는다. 한국 대중가요는 한국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으로 중국으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연장해 달라고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시위성 플래시 몹을 벌릴 정도가 되었다.
유럽에서까지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K-POP의 배후에는 클럽 DJ출신 작곡가들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제한없이 세계 최고의 곡을 틀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곡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인을 매료시키기 시작한 K-pop은 세계와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빚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국제경쟁에 노출된 산업은 국제 수준에 근접했다
한국의 제조업과 건설업과 대중가요는 국제수준에 근접했거나 넘어섰다. 이 산업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찍부터 국제경쟁에 노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중가요가 그렇다는 사실은 방금 설명한바와 같다. 제조업의 기업들도 비록 국내시장에서는 보호를 받았지만 국제시장으로의 진출을 하게 된다.
정부가 나가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수출금융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외국시장에 나갔다는 것이다. 한국의 제조기업들은 경쟁력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 미국 등 해외시장 진출을 시작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쟁력을 쌓아갔다. 건설업 역시 마찬가지다. 중동의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 하청업체로 해외진출을 시작해서 결국 세계 최고의 건설기업으로 자라났다.
제조업과 건설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제경쟁에 노출되어 성공했다면 순전히 타의로 경쟁에 노출된 산업들도 많다. 서비스업들이 그렇다. 그런 이 산업들도 개방이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국내 소비시장을 가장 먼저 개방한 산업은 과자산업이다. 1970년대의 일이었는데, 해태 롯데 오리온 등 국내과자기업들은 모두 국내 과자산업이 붕괴할거라며 개방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자산업쯤은 버려도 된다는 생각이 개방을 강행하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제과 기업들이 망한 것이 아니나 오히려 경쟁력이 강해져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하게 된 것이다.
우선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신제품들이 개발되었다. 74년 ‘초코파이’(오리온), 75년 맛동산(해태), 79년 빠다코코낫(롯데), 80년 포테토칩(농심), 82년 홈런볼(해태), 84년 버터링(해태) 등의 신제품 과자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키운 기업들은 해외 진출을 시도하여 ‘초코파이’,
‘꽃게랑’ 등은 베트남, 러시아 중국 등에서 인기 품목을 만들어내기에 성공한다.
유통산업 역시 시장 개방 이후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유통산업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 위주의 구조이다 보니 점포의 숫자는 많고 유통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유통마진이 높아서 산지가격과 소비자가격 간의 차이도 큰 고질적인 현상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수십년간 이런 상태가 유지되었는데도 외국의 경쟁력 있는 유통업체들이 국내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 10일(현지시간) 파리 제니트 공연장에서 열린 SM 타운 라이브 공연에서 한 한류팬이 태극기 옷을 입고 하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유통시장이 외국업체에 개방되면서부터이다. 1996년 1월 유통시장의 개방과 더불어 네덜란드계 마크로, 프랑스계 까르푸가 문을 열었다. 1998년 7월에는 드디어 세계최대 유통기업인 미국 월마트가 마크로를 인수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 세계 1위인 월마트, 2위인 까르푸에 이어 3위인 영국계 테스코도 삼성과 합작, 홈플러스란 브랜드로 한국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에 가세했다.
개방 당시 한국의 유통은 그야말로 유치산업이었다. 그러나 세계최강 유통 기업들과의 경쟁은 한국 기업들로 하여금 환골탈태의 변신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와 홈에버는 제각각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의 마음을 잡는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10년도 안된 2006년 월마트는 이마트에게, 그리고 까르푸는 홈에버의 이랜드 그룹에게 모든 점포를 넘기고 사업에서 철수하게 된다. 유치산업으로 출발한 한국의 유통업체들이 세계 최강의 유통기업들과의 경쟁을 이겨낸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오랜 기간 동안 국제경쟁에 노출된 산업은 대부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 한국 현대경제사의 교훈이다.
법률과 의료와 농업의 낙후
국제경쟁에 노출된 산업이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과 대조적으로 세계와 담을 쌓고 국내 시장에만 머물러 있던 산업들은 대부분 낙후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법률, 의료, 학교 등의 분야는 세계에 내놓기 민망할 정도다. 외국의 로펌들이 들어올 경우 한국 로펌이 모두 망한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바로 경쟁력이 없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 역시 외국 의사나 외국 병원들이 국내에서 영업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한다. 우리보다 의술이 뛰어난 나라에서 받은 의사면허도 우리나라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외국 학교의 진출을 허용하자는 계획에 대해 귀족 학교가 출연하게 된다는 등의 반대 이유를 대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 쪽으로 학생들이 몰리고, 또 기존의 학교들과 비교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산업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학교 시절 성적이다. 지금은 삼성전자에 들어가기가 무척 어렵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어려운 직장이 아니었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던 79년만 하더라도 웬만한 공대를 나온 사람이면 삼성전자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고졸 출신도 많았다. 현대중공업 같은 곳은 더욱 입사가 쉬웠고, 그런 만큼 사원들의 평균 학력이나 학교 때의 성적도 낮았을 것이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세계 초일류 기업들이 탄생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의료와 법률서비스 분야는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차지였다. 머리도 좋고 노력도 많이 하는 학생들만이 법대와 의대를 갈 수 있었다. 특히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법고시를 통과해야 했는데, 초기에는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려웠다.
사법고시 통과자의 지적 수준이 최고일 것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국 법률 산업의 세계적인 위상은 대중가요, 과자산업, 삼성전자, 현대중공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뒤쳐져 있다. 법률만큼은 아니지만 의료 역시 훌륭한 인재를 가지고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은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보호는 안일한 태도를 만들어내고, 그런 태도는 뛰어난 재능조차도 무력화시킨다. 농업 역시 철저히 보호된 산업이었다. 쌀은 아예 수입을 금지해왔으며, 다른 농산물들도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농업이 발전했다는 증거는 없다. 농업은 가장 낙후된 산업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제조 및 건설 기업들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구성원들을 가지고 초일류 기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개방하는 것이 현명하다
장하준은 FTA를 조롱하면서 자조적으로 상대방이 열든 안열든 스스로 여는 것이 자유주의에 부합한다고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그의 조롱 섞인 그 말이 옳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자의든 타의든 국제경쟁에 노출되었을 때 우리 산업들의 경쟁력은 획기적으로 높아져왔다.
삼성전자가 환골탈태를 통해 소니를 넘어선 것은 수입선다변화 정책의 폐지로 인해 일본 가전제품이 무방비로 들어오게 될 즈음이었다. 한국 영화가 발전의 전기를 잡은 것은 외국영화 직배가 허용되면서이고, 현대자동차의 변신도 외국차들의 보급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자원이라고는 없는 홍콩이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 개방을 택했기 때문이다.
답은 분명하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선진국이 보호주의로 성공했다고?
장하준은 그의 출세작인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사다리>란 보호무역과 유치산업 보호, 산업지원 정책 같은 것들이다. 지금의 선진국들은 과거에 그 사다리를 타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와 놓고 이제와서 후진국들이 사다리를 오르려고 하니까 그것을 걷어차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논리는 <23가지>에서도 빠짐없이 반복되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도 특히 자유무역의 본산을 자처해온 미국과 영국 역시 보호 무역으로 성장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자유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사실 지독한 보호무역주의자였으며 노예제를 찬성한 남부가 오히려 자유무역을 지지했다고 한다. 장교수가 보기에 미국은 보호무역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란다.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보호무역을 통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과 미국이 보호무역을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이 나라들이 발전했던 것은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까지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호주의에 기반한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자유무역은 도시국가에서나 하는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보호주의를 했던 것이 프랑스였다. 만약 보호주의가 좋은 정책이라면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나라들이 다 경제성장을 경험했어야 했다. 보호주의가 발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보호주의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로를 통한 경제적 자유와 시장의 확대가 선진국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을 보자. 19세기 중 미국이 관세를 높게 유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절 미국의 왕성한 경제성장이 관세 때문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도였다. 광대한 미국의 땅이 철도로 연결되면서 시장은 통합되어 갔고 지역간의 교역은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서로 오갈 수가 없어서 실질적으로 외국이나 다름 없던 지역들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갔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미국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유기업의 나라였다. 록펠러(석유)와 밴더빌트(철도), 카네기(철강), 에디슨(전기), 알렉산더 그래험 벨(전화) 같은 기업가들이 기업을 만들고 돈을 벌었다. 철도의 부설로 시장이 통합되어 갔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기업가 정신이 왕성하게 발휘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외국과의 교역에 대한 높은 관세는 오히려 자본축적을 저해해서 발전의 과정을 방해했다.(주1) 19세기의 미국은 높은 관세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한 것이지 높은 관세의 덕을 본 것이 아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나라들의 성장 역시 그렇다. 중세 시대에는 유럽의 땅이 수많은 영지나 왕국들로 조각나 있었고 각 나라들은 저마다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인구의 이동도 물자의 이동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민족국가의 등장으로 인해 지리적 통합이 이루어져 갔고 지역마다 부과하던 통행료 같은 장벽들이 없어져 시장이 확대되어 갔다. 이는 지역 간의 무역이 자유화되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시장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나라 안에서의 지역간 교역이 확대되어 갔기 때문에 비록 높은 관세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지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경제성장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 GDP에 대한 수출 상품의 비율 |
경제성장에 있어서 보호 무역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200년 전의 상황이 아니라 교역의 비중이 훨씬 높아진 현대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로는 Dollar와 Kraay의 것이 있다.(주3) 이들은 개발도상국 중 1980년대부터 시장개방(관세를 낮추는 등)을 시작한 나라들(그룹 1)과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나라들(그룹 2), 그리고 선진국(그룹 3)(주4)을 비교해서 시장개방과 세계화가 각 나라의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했다.
결과는 장 교수에게는 실망스러운 숫자들을 담고 있다. 개방에 적극적이었던 그룹1은 1980년대에 관세율을 22 퍼센트 포인트 내린 반면 그룹 2는 10% 내리는 데에 그쳤다. 만약 높은 관세율이 성장의 원동력이라면 관세율 인하폭이 작은 그룹2의 성장률이 더 높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 나타난 결과는 그 반대이다. 그룹1의 1990년대 1인당 소득 성장률은 5.0%인 반면 그룹2는 1.4%에 불과했다. 선진국들로 구성된 그룹 3은 2.2%였다. 1인당 소득 성장률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룹 1 > 그룹 2 > 그룹 3 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Dollar와 Kraay는 여러 가지의 통계분석방법을 통해서 이 숫자들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세 인하를 비롯한 무역장벽을 낮춘 나라는 더 높은 경제성장을 성취한다. 둘째, 적극적 개방정책을 편 개발도상국은 성장률이 높기 때문에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혀 나갈 수 있지만, 개방에 소극적인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이 낮기 때문에 선진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간다. 보호무역이 개발도상국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장교수의 주장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결과다.
보호무역을 옹호하기 위해 장교수가 채택한 방법은 자신의 주장에 맞는 구체적 사례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매우 불완전하며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내기 십상이다. 어느 나라에나 경찰이 존재하고 동시에 범죄자도 존재한다. 그같은 상관관계에서 기초해서 경찰 때문에 범죄가 생긴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대부분의 나라가 어느 정도의 보호무역을 하고 있다. 때문에 보호무역을 하는지 안하는지의 여부만을 가지고 보호무역의 효과를 측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보호 정도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신의 연구 결과는 관세를 낮추는 등 보호의 정도를 낮출 때 성장률이 높아짐을 말해준다. 보호무역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다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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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도 자유시장경제로 선진국 진입…미르달 관점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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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애써서 돈을 벌기보다 공짜로 사는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이 복지제도를 부르짖는 이유도 일하기보다 편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한번쯤은 공짜의 삶과 복지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그로인해 다가올 불행한 미래 때문이다.
베짱이처럼 살다보면 겨울이 더욱 추워진다는 것을 어릴적부터 우리는 배워왔다. 그런데 장하준은 복지제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교묘하게 뒤엎는다. 복지제도를 해도 여전히 나라는 잘 살 수 있으며 오히려 경제성장율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장하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잘 설계된 복지 정책이 있는 나라 국민들은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에 오히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보호 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산업이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해도 실업 수당을 받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 반해 미국 사람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생활이 심하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복지 정책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들이 이른바 ‘미국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1990년 이후에도 미국과 비슷한 성장을 하거나 심지어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장하준 23가지, p290)
장하준의 이 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미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보호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하다. 둘째, 그 이유는 복지제도가 안전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셋째, 스웨덴 등 복지정책이 잘 갖춰진 나라가 1990년대 이후 미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각각의 부분들이 얼마나 사실인지에 대해서 꼼꼼히 따져보자.
재정 규모가 큰 나라가 더 개방적이라고? 아전인수식 해석
먼저 사실부터 확인해 보자. 과연 미국보다 유럽의 나라들이 더 자유무역에 대해서 개방적인가? 또 유럽의 나라들이 미국보다 더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자유지수(주1)를 가지고 장하준의 말이 얼마나 사실인지 확인해보자.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자유지수는 국가별로 10개의 하위지표를 가중평균해서 산출되는데 그 하위 지표들 중에서 장하준의 말과 직접 관련을 가지는 것은 재정지출 지표(Government Spending)와 무역자유 지표(Trade Freedom)이다.
이 지표들은 0과 1 사이의 값을 갖는데, 재정지출 지표의 경우 재정지출 규모가 작을수록 지표값은 커진다. 무역 자유 지표는 무역 개방의 정도가 클수록 높게 매겨진다. 다음의 표는 미국과 북유럽 세나라의 재정지출 지표와 무역자유지표이다.
미국의 재정 지출 지표는 54.6으로서 각각 스웨덴의 17.3, 핀란드의 26.5보다 높다. 노르웨이는 51.5로서 미국보다 약간 낮다.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스웨덴과 핀란드의 경우 재정지출 규모가 미국에 비해서 현저히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역의 자유도는 장하준 교수의 말과 다르다. 이 네 나라의 무역자유도는 미국 86.4, 스웨덴 87.6 핀란드 87.6, 노르웨이 89.4로서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 재정지출 지표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역자유도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안전망 때문에 유럽국가들이 개방적이 되었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은 근거가 없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떨까? 여러 나라들을 대상으로 이 재정규모와 무역자유도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관계수를 이용하기로 한다. 상관계수란 두 개의 변수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 지를 보여주는 숫자로서 두 변수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의 값을 갖고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의 값을 갖는다. 완전히 똑같이 움직이면 상관계수는 +1이고 정반대로 움직이면 상관계수가 -1이 된다.
재정규모가 클수록 무역자유도가 높아진다는 장하준의 말이 맞다면 이들 두 지표간의 상관계수는 -1에 가까워야 한다. 반대로 상관계수가 1에 가깝다면 둘은 역의 관계가 된다. 만약 둘 간에 어떤 관계도 없다면 상관계수는 0이 될 것이다.
OECD 33개국을 대상으로 계산한 상관계수는 -0.31이며 약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나라들끼리의 비교를 위해 지역을 달리해서 분석할 경우 이 두 지표간에는 장하준 교수가 말하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유럽 나라들은 -0.09, 중아시아태평양지역은 0.064, 중동/북아프리카는 -0.42, 북미는 -0.98, 중남미는 0.32 등이다. 장하준 교수의 말에 부합하는 경우는 북미와 중동 아프리카 지역이다.
북미의 경우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세 나라뿐인데 그 중에서 멕시코가 재정규모는 작은 반면 개방도는 유난히 높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반면 유럽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우 두 지표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중남미의 경우는 이 재정지출이 작은 나라가 오히려 무역이 더욱 자유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재정규모가 클수록 자유무역에 덜 저항한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은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이다.
스웨덴도 자유시장경제로 부자나라가 됐다
한국과 더불어 스웨덴은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논점을 입증하기 위해 자주 등장시키는 사례이다. 파업으로 지새우던 나라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높은 복지에도 불구하고 아니 높은 복지 때문에 미국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하지만 실제의 스웨덴의 역사는 장하준의 논점을 부인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100년간 스웨덴의 성장은 자유주의 경제 때문에 가능했다.(주2) 본격적인 복지제도는 1970년대 이후 20년 정도 지속되는 데 그 시간 동안은 스웨덴은 저성장으로 몸살을 앓는다. 다시 성장의 계기를 찾은 것은 9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을 택하면서부터이다. 스웨덴의 경제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스웨덴은 1864년부터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택한다. 그뒤 60년 동안 스웨덴은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경제를 구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복지제도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다음의 표는 1870년부터 20세기 말까지의 각 나라별 재정의 비중을 보여준다. 1870년 경제성장을 시작할 당시 스웨덴의 경제규모에 대한 재정 비중은 5.7%로서 세계 어떤 나라보다 작은 상태였다. 7.3%의 미국보다 더 낮았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스웨덴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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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복지제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였다. 마치 한국이 지난 60년간 그랬듯이 이 나라도 7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되고 1932년 드디어 사회민주당이 집권한다. 그것이 복지제도의 시발점이 된다. 하지만 사회민주당도 그 후 40년간은 그리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펴지 않는다. 임금정책만 보더라도 오히려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폈던 것이 사실이다. 1970년까지도 스웨덴은 고속성장을 지속한다.
성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철저한 복지제도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GDP에 대한 재정지출의 비중은 급격히 늘기 시작해다. 1980년 정부재정의 비율은 국민총생산의 60%에 달함으로써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상태가 된다. 세금이 급속히 늘어나 일부 부자들에게는 한계세율이 100%를 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기업에 대해서도 개입정책이 강화되어 기업을 보호하고 보조금을 주는 정책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수입에 대한 제한조치들이 등장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조치도 강화되었다. 1970년대 이후 20년간 스웨덴은 장하준이 권할만한 정책은 모두 한 셈이다. 하지만 결과는 장하준의 참패다. 그가 조롱해 마지 않는 주류경제학의 예측이 현실로 나타났다. 근로의욕은 감퇴하고 투자는 사라졌으며 실업은 늘었다. 소득은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뒤걸음질을 쳤다. 급기야 1992년 외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한 스웨덴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장하준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혐오할만한 모든 것들로 대응한다. 복지 혜택 및 재정 축소, 감세, 공적연금의 부분 민영화, 바우처 제도에 의한 공립학교 선택제 등 파격적인 자유주의 개혁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민영화에도 착수했다. 스웨덴은 경제위기의 과정에서도 시장의 자유도를 늘린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다.
복지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안심하고 모험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 장하준 교수의 논점이다. 그 말이 맞다면 복지제도가 철저히 자리잡는 1970년대 이후부터 새로운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투자도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다. 스웨덴의 50대 기업 중에서 오직 한 개만이 1970년대 이후에 등장했다.(주3) 나머지 49개는 자유방임 경제 시절에 등장했던 기업들이다.
자유경제로의 전환은 복지와는 무관한 과정인 것 같다. 한국의 60년대, 중국의 80년대, 인도의 90년대 대전환이 모두 그렇다. 자유경제의 기간이 수십년 지속되면 부가 축적되는데, 그리고 나면 그 돈을 쓰고 싶은 대중적 욕구가 분출된 결과가 복지국가라는 것 아닐까.
복지제도가 사람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변화하게 만든다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유럽 노동자들에 대한 OECD의 인터뷰 결과, 노동시장 보호가 강한 스웨덴 프랑스 독일 등의 노동자가 유연한 노동시장의 미국 캐나다 덴마크의 노동자보다 더 실직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주4) 복지제도는 사람들을 안주하게 만들고 더욱 변화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20년의 철저한 복지혜택 후 90년대 초에 결국 스웨덴마저 외환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장하준이 즐겨 내놓는 90년대 이후 스웨덴의 고속성장은 외환위기 이후에 이어진 자유주의정책들 때문이다. 민영화, 복지 혜택 및 재정 축소, 감세, 공적연금의 부분 민영화, 바우처 제도에 의한 공립학교 선택제 등 파격적인 자유주의 개혁이 그것이다.
◇ 스웨덴식 복지모델을 상징하는 그림. ⓒ인터넷 화면 캡처 |
스웨덴의 미르달과도 다른 장하준의 복지제도론
장하준은 미르달 상을 받은 학자다. 미르달은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경제학자이며 스웨덴 복지제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복지제도에 대해서 미르달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스웨덴이 복지제도를 할 수 없다면 세계 어떤 나라도 복지제도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복지제도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람들이 일할 의지를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국가가 먹여 살려주는 데다가 일을 해서 돈을 벌더라도 그 중 큰 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일을 하나 안하나 차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일할 의지를 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미르달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가장 작은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라고 확신했다. 첫째 스웨덴 사람들의 청교도적 근로윤리가 누구보다 확고하기 때문이고, 둘째 스웨덴 사회가 상당히 동질적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스웨덴은 원래부터 부지런한 가족같은 국가이기 때문에 복지를 하든 세금을 높이든 관계없이 여전히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그토록 노동윤리가 철저했던 스웨덴 사람들조차도 복지제도 앞에서는 게을러져 갔다. 1970년대 이후의 성장률 둔화와 1990년대 초의 외환위기가 바로 그 증거다. 1990년대 이후의 고성장은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본격적 자유경제적 개혁의 산물이다. 장하준은 그런 사실조차도 본인의 의도에 맞게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 버렸다.
불안전한 고용이 의대 법대 준비생을 늘렸다고?
장하준의 아전인수식의 사실 해석은 한국 학생들이 의대를 선호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한국 학생들 중 의대 지원자가 많은 이유를 90년대말 외환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유연화 때문인 것으로 몰아간다.
2003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위 2퍼센트에 드는 이공계열 대학 입시생 다섯명 중 네명이 의대를 가고 싶어한다. (중략) 한국에서 의대가 늘 인기를 누리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초특급 인기는 (중략) 21세기에 들어 나타난 현상이다. (중략) 이런 기현상의 원인은 지난 10년 사이에 직업 안정성이 극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략) 1997년 금융 위기 전까지만 해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종신 고용을 보장받고 일했다. (중략) 그러나 이제는 (중략) 정규직 직원이라도 40~50대의 나이든 노동자들은 젊은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일자리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분위기를 견뎌내야 한다. (중략)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얼마나 사실일까. 우선 성적 상위권 학생 중 의사 지망생 많은 현상이 과연 외환위기 이후에 특별히 나타난 현상인지부터가 의문이다. 필자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75년이다. 고등학교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다녔으니 장하준의 말대로라면 노동시장의 유연성과는 거리가 먼 시절이었다.
40년이나 된 과거사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사실이 있다. 문과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서울대 사회계열(당시에는 법학과를 따로 뽑지 않았다), 이과 다니는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의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들 순으로 의대를 갔다.
대학을 가서도 문과생들은 사법고시, 행정고시, CPA 공부, 관세사 같은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서도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특별대우했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학생조차도 행정고시 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을 정도다.
의대 법대와 관련하여 21세기적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하다.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이다. 외환위기와 더불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시절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생겨 2005년부터 학생을 모집했다. 당연히 대학에서도 이과계열 공부를 학생들이 많이 생겨났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2007년에 법이 통과되었으니 그 때부터 학생들은 로스쿨을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대 입학 준비와 변호사 판검사가 되기 위한 노력에 특별히 21세기적인 것이 있다면 이런 새로운 제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게다가 고용의 불안정성은 기업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의사 역시 숫자가 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부도에 몰리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사면허만 따면 일생이 보장되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도 앞길이 막막한 변호사들이 많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진정한 복지제도는 최빈층의 구제여야 한다
복지제도가 사람들을 혁신적으로 만들고 성장률을 끌어올린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은 틀렸거나 거짓이다. 복지제도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성장률을 낮춘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당연한 법칙마저 장하준 교수는 부인하려고 한다.
필자도 물론 복지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는데 한쪽에서 굶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짜로 사는 식의 복지는 곤란하다. 그것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복지제도의 철학은 자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소년소녀 가장이나 무의탁 독거노인들, 장애우들, 이런 사람들 대상의 복지제도는 더우 강화할 필요가 있다. 소득의 가장 밑바닥을 끌어올려서 전체의 수준을 올리는 정책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복지수혜자들의 근로의욕 감퇴가 따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자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로 한정을 짓자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 복지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틀렸거나 또는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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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자유지수 홈페이지는 http://www.heritage.org/Index/ 참조할 것
2 Economics 101: Learning From Sweden's Free Market Renaissance, http://www.youtube.com/watch?v=ENDE8ve35f0
3 Johan Norberg, Swedish Models; http://www.johannorberg.net/?page=articles&articleid=151
4 Johan Norberg, Swedish Models; http://www.johannorberg.net/?page=articles&articleid=151
글/김정호 자유기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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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학자들은 시장친화 주장했지 특정기업 봐주라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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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저술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책 표지. |
Thing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장을 생각해 보자. 이 제목만 보면 독자들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특정 기업을 우대하는 정책이 나라 경제에도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찌 보면 모함이다. 어떤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특정 기업에 좋은 일을 하라고 주장을 하는지 묻고 싶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친화적인 제도를 주장한다. 쉽게 기업을 만들고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특정한 기업을 봐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처방을 좋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자유를 허용하면 경쟁이 치열해질텐데, 치열한 경쟁을 좋아할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지원과 보호는 오히려 장하준 교수의 전매특허 아닌가.
Thing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도 그렇다. 어떤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아프리카의 저개발이 숙명이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경제학자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밀튼 프리드먼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의 성공은 흔히 풍부한 자연자원과 광활한 국토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분명히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만일 자원과 국토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19세기의 영국이나 일본, 그리고 20세기의 홍콩은 무엇 때문에 성공한 것인가?" (밀튼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p. 61)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사람들 각자에게 재산권을 보장해주고, 자유를 허용하면 부가 창출된다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그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부 조건의 열악함으로만 따진다면 우리의 대한민국 역시 최악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다는 말을 되뇌였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발전했던 것은 일하고자 의욕과 세계 시장을 활용했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가능하게 했던 새로운 제도적 환경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하준 교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의아한 것은 그런 논점으로 왜 ‘그들’ 즉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을 공격하는가이다. 어쩌면 장하준 교수의 생각 속에 자유주의 경제학자는 아프리카의 저개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엉터리 학자의 모습으로 고착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역시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공격이다. 교육만 많이 시키면 나라가 더 잘살게 된다고 믿는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자유주의를 좋아하는 경제학자지만 최소한 나는 교육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하준 교수의 견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뉴욕대의 이스털리 교수의 말을 인용해 보자.
“왜 교육이 경제 성장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닌지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실마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습득한 스킬로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정부 개입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기술은 정부에 대한 로비 기술이다. 정부는 개입을 통해 이윤기회를 창출한다. 예로 환율을 고정하고, 외환 거래를 금지하고, 고인플레를 야기하는 정부는 달러 거래 유인을 창출한다. 이때 숙련된 인구는 낮은 고정 환율로 외환을 매입하기 위해 정부에 로비를 할 것이다. 매입한 외환을 암시장에 내다 팔면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활동은 GDP 성장에 기여하지 않는다.” (윌리엄 이스털리, 성장, 그 새빨간 거짓말, p. 120).
쉽게 말해서 도둑질로 돈 버는 것이 가능한 체제에서는 교육이 오히려 도둑질의 기술만 더 향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교육이 성장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인센티브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다시 이스털리의 말을 인용해보자.
“일국에서 교육의 질은 미래 투자 유인의 존재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미래 투자 유인이 존재한다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부모는 교육의 질을 감시할 것이고, 교사들도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미래 투자 유인이 없다면 학생들은 수업에 빠질 것이고, 부모들은 자녀를 학교보다는 농장에서 일하라고 시킬 것이며, 교사들은 고학력 베이비시터로서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윌리엄 이스털리, 성장, 그 새빨간 거짓말, p. 121).
이처럼 경제적 유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교육이란 그저 호사스런 소비행위이거나 또는 해로울 수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교육 원조가 그 결과를 증명해주었듯이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자유주의 경제학의 견해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장교수는 엉뚱한 표적을 만들어 놓고 사격을 하고 있는 셈이다.
Thing 9 “우리는 탈산업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시 자유주의 경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장의 주요 논점은 제조업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인데, 최소한 필자가 아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중에 제조업을 무시하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을 한다면 제조 과정 그 자체보다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만드는 데 기계를 제조하는 과정 그 자체보다는 아이디어와 디자인,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해서 제조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어느 것이나 산업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경제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산업이 있다.
정책의 측면에서도 모든 산업이 다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어떤 산업도 특별히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이 제조업을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논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장하준은 엉뚱한 표적을 만들어놓고 자유주의 경제학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Thing 6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온다" 에서도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오해가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최악이라는 이기심만 가득한 인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공격이다. 어떤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인간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임을 전제로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밀튼 프리드먼의 말을 다시 인용해보자.
“경제학은 금전적인 자극에만 움직이는 계산기와 다름없는 ‘경제인’이라는 아주 비현실적인 가정으로부터 도출한 당치않은 결론 때문에, (중략) 매도당해 왔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실수인 것이다. 이기심self-interest이란 근시안적인 이기주의myopic selfishness가 아니다. 이기심이란 말하자면 구성원의 흥미를, 관심을 끄는 것이며,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들인 것이다. (중략) 진실 된 믿음을 일깨워 주려는 선교사나, 헐벗은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자선사업가나 (중략) 그들 자신이 보는 관점에서 그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여서 그들 자신의 이기심을 쫓고 있는 것이다.”(밀튼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p. 50).
인간은 이기심(좁게 해석한 이기심)과 더불어 이타심도 있다. 그리고 소득이 높아질수록 이타적인 성향이 더 잘 나타난다는 사실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실증적, 이론적 연구를 통해서 잘 드러났다.
자유주의경제학자들이 자유시장을 주장하는 것은 자유시장을 통해서만 인간의 이기적 측면이 공공의 선으로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지, 이타심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시장이 없을 때 이기심은 뇌물과 추악한 자리다툼, 밥그릇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이기적인 성격이 강한 사람이라도 고객들에게는 친절하고 믿음직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장이다.
Thing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 살고 있다"에서도 장교수의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오해가 스며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자기 나름의 계획을 세우며 그것은 시장질서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그런 계획은 철저히 옹호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경계하는 계획은 정부가 기업이나 또는 다른 민간 조직의 계획에 간섭하거나 또는 정부가 만든 계획을 강요하는 일이다.
물론 정부의 계획이라고 하더라도 재정지출이나 조세수입,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자기 고유의 영역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당한 정부계획의 영역이다. 정부 고유의 영역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기업들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계획경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것을 계획경제라고 부른다면 세상 모든 경제는 계획경제가 된다. 일종의 말장난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장에서도 장 교수는 엉뚱한 비판을 하고 있는 셈이다.
Thing 5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더 세상을 바꿨다"에서 장하준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인터넷의 영향을 과대평가했다고 비난한다. 돌이켜보면 인터넷에 대한 기대와 예측이 지나쳤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만의 오류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IT 전문가들이 인터넷으로 인해 세상이 바뀔 거라 생각했었다. 심지어는 자기 돈을 걸었던 투자자들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10여 년 전 인터넷 벤처 기업에 투자했던 수많은 투자자들이 돈을 날리고 눈물을 삼켰던 것은 인터넷 경제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유주의 경제학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Thing 10에서 장하준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것 역시 자유주의경제학에 대한 오해를 유도한다. 미국이 가장 잘사는 나라이든 아니든 그것을 중요하게 말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을 본 적이 없다. 또 자유주의 학자들이 미국을 모델이라고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뉴딜 정책 이후의 미국은 그렇다. 오히려 홍콩이나 싱가포르, 스위스,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이 자유주의 경제의 모델로 주로 등장한다. Thing 10 에서도 장하준은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오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23가지 가운데 최소한 8가지는 장 교수가 자유주의 경제학을 오해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오해는 장 교수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의 책을 읽는 수십만 독자들에게로 퍼져나가고 있다.
글/김정호 자유기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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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대체를 통한 자급자족이 아니라 수출지향형 개방정책을 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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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는 개발경제학의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기 위한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바로 모국인 대한민국이 굶어 죽어 가던 나라에서 몇 십 년 만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직접 겪었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 인만큼 그 말을 듣는 다른 세계인들은 훨씬 믿음이 갈 것이다.
장하준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제성장, 그 중에서도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이 보호 무역과 관치금융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또 다른 히트작 <나쁜 사마리아인>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신자유주의 주도자들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기적의 세월 동안 한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발전 전력을 추구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한국 정부는 이 기간 동안 민간 부문과의 협의 아래 특정한 새로운 산업을 선택하고 보호관세나 보조금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지원을 통해서 그 산업이 국제경쟁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성숙할 수 있도록 육성했다.(주1)
사실 장하준의 이런 비판은 국내의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의 학자들 중에서 60~80년대 박정희 시절을 신자유주의 정책의 시기였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란 World Bank 중심의 정통경제학자들을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주2)
대다수 한국인들은 장하준과 같이 관치경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1989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정책 관련 시민단체인 경실련도 관치경제의 청산을 중요한 활동 목표 중의 하나로 삼았다. 시민단체들은 일반적으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시민단체가 관치경제를 박정희 시대의 유물로 보고 청산의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이니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를 얼마나 관치경제의 시대로 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이후 20년간을 시장경제의 시대로 보는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필자와 더불어 KDI 스쿨의 유정호 박사, 민경국 교수, 복거일 소설가 정도다. 기업과 국민들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이런 저런 간섭을 한 것이 분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절을 왜 시장경제의 시대라고 보는지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박정희 시대
필자가 박정희 시대를 시장경제의 시대라 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경제사에서 박정희의 위치가 중국경제사에서 등소평과 같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 경제와 비교해 보면 중국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통제가 많은 나라이다. 기업을 만들기도 수출, 수입을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이 집권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은 분명 경제적 자유의 시대, 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한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등소평 이후의 시대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80년대 이전의 모택동 시대에서 비해서 자유와 시장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등소평 이후의 시대를 자유와 시장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새로운 자유 때문에 중국 경제는 연평균 10%의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정확히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비해서 경제적 자유와 시장의 폭이 늘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보다 지독한 통제에서 부분적 통제로의 전환이 경제적 자유와 시장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다.
정부의 경제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조선왕조 500년의 본질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가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개항 및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경제적 자유가 늘어나기 시작하다가 1939년 중일전쟁과 더불어 이 땅의 경제는 철저한 명령경제로 바뀐다. 전쟁 물자 동원을 위해 일제는 조선의 모든 것을 전쟁동원 체제로 전환했다. 기업 활동은 정지되었고, 쌀과 그릇까지 공출의 대상이었다. 생필품의 공급은 배급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과 말은 자유경제, 자본주의가 옳다고 내세웠지만 그것을 실천할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쌀은 정부가 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낮은 가격에 공출을 해갔고, 소비자는 정부로부터 배급을 받아야했다. 이자는 시장이율보다 매우 낮은 상태로 규제되었고, 은행 대출도 허가제로 운영되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더욱 심했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일본과의 교역은 거의 끊긴 상태였다. 수출과 수입은 허가제로 운영되어 정부의 허가 없이는 어느 것도 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지나치게 고평가된 원화 가치 때문에 수출은 해 봐야 남는 것이 없는 장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태가 1960년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해서 1939년부터 1960년까지의 20여년 이 땅의 경제는 명령경제, 통제경제, 배급경제, 폐쇄경제였던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직후인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경제의 폐쇄성이다. 1962년부터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제일 큰 이유는 환율의 현실화였다. 그 이전까지의 환율은 수출을 기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았다. 그 환율이 차츰 시장환율에 접근해갔고 그것이 수출의 인센티브를 높여 놓은 것이다.
급기야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수입대체를 근간으로 하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출촉진으로 바꾸는 내용의 수정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많은 정책들을 수출촉진에 맞춰 바꾸어간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대일본 수출이 늘어나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으로 진출해 기업들을 만들어간다. 그 이전까지 거의 작동하지 않거나 또는 매우 미약하던 시장기능이 그래도 박정희 시절부터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수출촉진책과 반공정책, 노력동원체제, 중화학공업 육성 등의 정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수출촉진책은 죽은 시장을 살려내는 수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확대를 두고 정부주도정책의 성과라고들 이야기 한다. 정부가 무엇인가를 했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작동 과정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의 정부주도정책은 아니었다. 수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기존 정부정책을 완화내지 무력화시키는 차원에서의 정책들이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까지 해왔던 수출입 관련 정책들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방 이후 박정희 시절까지 수출이든 수입이든 거의 길이 막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미군정은 1946년 1월과 5월 ‘대외무역규칙’을 통하여 민간의 자유로운 대외무역과 재산의 반출입을 금지하고 정부의 직접 통제 하에서만 해야 한다는 국영무역의 원칙을 공포했다.
◇ 1965년 5월 18일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대통령. ⓒ 국가기록원 |
수출입업자는 정부의 면허를 받아야했고, 수출입 상품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수출입 가격은 정부의 사정을 받아야했고, 수입품 판매대금은 강제예치를 해야 했고, 수출품 구입에만 사용해야했다. 그 나마도 당시의 무역은 물물교환 방식, 즉 바터무역으로 이루어졌다.(주3) 이승만 행정부로 주권이 넘어간 후에도 무역에 관한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수출입에 대한 규제는 지속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수출까지 규제되었다는 것은 뜻밖이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곡물, 비누, 화학약품, 피혁, 가축 등의 품목은 아예 수출 자체가 금지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수출에 장애가 되었던 것은 환율이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공정환율을 최대한 낮게 책정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유엔군 대여금 때문이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UN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원화자금을 한국정부로부터 대출받은 후 상환은 달러화로 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로서는 그렇게 상환 받는 달러화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최대한 환율을 낮추고 싶어 했다. 그처럼 낮게 책정된 환율이 당시 한국정부의 외화수입을 늘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수출에는 치명적 장애였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우리나라의 수출입은 모두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1959년부터 수출이 늘기 시작하는데, 그 중 1959년의 수출증가는 일시적인 농산물의 수출증가에 따른 것이었다.(주4) 반면 60년 이후의 수출증가는 주로 제조업 제품, 그 중에서도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 수출이 늘어난 덕이다.
1960년 이후의 제조업제품 수출 증가는 정부의 수출촉진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문제를 오래 동안 연구해온 KDI 스쿨 유정호 박사의 견해다.(주5) 박정희 집권 직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수입대체’를 기조로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관세만 하더라도 1955년 평균 27%이던 것이 1960년대 초에는 오히려 49.5%로 올라간 후 수년간 계속된다. 이런 상태가 ‘수출촉진’으로 바뀐 것은 1964년 제1차 5개년계획의 보완계획에서부터이다.
그러면 제조업의 수출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유정호는 환율의 인상을 제일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대미 달러 공정환율의 경우 1960년 2월에 50:1에서 65:1로, 1961년 1월에 100:1로, 1961년 2월에 다시 130:1로 뛰어 오른다. 일 년 사이에 미국 달러에 대한 환율이 160% 상승함으로써 1950년대 내내 지속되던 원화의 과대평가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고 유정호 박사는 밝힌다. 이는 한국 제품들의 수출경쟁력이 생겨났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출은 급등세를 보이게 되면 드디어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수출촉진을 경제개발계획의 근간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것은 환율 인상의 목적이 수출 확대가 아니라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주6) 하지만 의도가 무엇이었든 현실화된 환율은 수출의 인센티브에 불을 붙였고, 그 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 수출의 역사가 펼쳐진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렇다. 환율 인상은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장면 정부에까지 걸쳐 일어난다. 그것으로 인한 수출확대효과는 박정희가 집권한 1962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가능성을 인식한 박정희는 그 후 수출확대를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수출이 확대됨에 따라 수입도 따라서 늘게 되고,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한국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세계시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 자료: 한국은행 온라인 서비스(2008. 10), 유정호 2008에서 재인용. |
환율 인상을 통한 수출 증가가 5.16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해서 한국 현대경제사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기여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연히 시작된 수출증대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경제정책의 방향을 수출촉진으로 바꾼 것은 당시 세계사적 흐름에 비추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5년을 전후해서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독립을 한다.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흥독립국들이 소위 경제적 주권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조치가 나라의 문을 닫고 수입대체를 통한 자급자족 정책을 추진한 것이었다.
자급자족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을 지배하던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국제 교역을 통해 자신들을 착취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급적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과 거래를 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가 영국 면직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직접 물레를 돌린 것은 신생독립국 주민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레비시 같은 남미 학자들의 종속이론은 수입대체와 자급자족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한국은 수입대체를 통한 자급자족이 아니라 수출지향형 개방정책을 택한 것이다. 또한 굴욕외교라는 오명을 써가면서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과의 교역을 시작한다. 신흥독립국 중에서 1980년대까지 수출지향형 개방정책을 쓴 나라는 한국과 더불어 홍콩, 싱가포르, 대만의 4개국이다. 그리고 이들 나라는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성공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내린 개방 결정이 기적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정부의 개입인가?
우리는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정부가 개입한 정책으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정부 개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 초기의 수출촉진책들은 오히려 수출에 장애가 되는 정부정책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환율이 현실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낮은 상태였다. 암달러시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거기에 덧붙여 수입에 대한 엄격한 제한도 수출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수입을 제한하면 그것과 경쟁관계의 국산품을 쓰는 수출산업의 경쟁력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입제한은 수출억제 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한국의 국내시장은 관세 비관세 장벽으로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로 인해 수출경쟁력 역시 낮은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촉진책들은 선진국 제품들에 대한 한국 수출품들의 약한 경쟁력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김광석과 웨스트팔의 연구에 의하면 박정희 당시 수출촉진책의 효과는 보호주의 수입정책으로 인한 수출저해효과를 거의 정확히 상쇄해주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존의 수입억제 정책들과 비현실적인 환율로 인해서 한국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채택한 수출촉진책들은 낮아져 있던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았고, 그것이 수출의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주7)
네 마리 용의 권위주의 체제와 시장경제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이 네 나라는 개방정책을 택했다는 것 말고도 권위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홍콩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총독의 통치 하에 있어서 정치적 자유가 전무했다. 박정희와 장개석과 이광요 역시 독재자였다. 그것과 경제성장은 어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신생독립국들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정치적 혼란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가 치안부재와 내전이다. 그런 사정은 네 마리의 용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역시 수많은 세력들이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으며, 직장 내에서 조차도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상적인 법질서를 위협하는 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시장경제의 기본인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안정성은 보장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노사 간의 계약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이 네 나라의 공통점은 어떤 식으로든 직장 내에서의 정치투쟁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박정희 역시 반공이라는 국시를 통해 집단행동과 정치논리로 점철될 수 있는 직장 내 질서를 계약에 의해서 작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생산 활동에 전념할 있었을 것이다. 또 생산성 높은 근로자들이 많은 보상을 받고 짧은 시간 내에 승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로의욕이 작동할 수가 있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의 그 같은 상황을 노동탄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생산현장이 정치투쟁의 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 조치였던 셈이다. 그로 인한 생산성의 증대는 노동자들에게 전반적 임금 상승이라는 열매를 가져다주었다.
박정희가 했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나 노동운동 탄압 같은 조치는 시장의 작동을 가능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였던 셈이다.
본격적 시장 개입은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 시절 진정한 의미의 대규모 시장 개입이라고 불릴만한 정책은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투자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금융지원이었다. 그러는 만큼 나머지 산업들에 대한 자금공급이 줄어들게 되고 전반적인 성장률 저하가 나타난다.
1960년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모든 산업에서의 수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데에 비해 중화학공업 정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수출촉진보다는 해당 산업들의 보호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 그 결과로 수출의 전반적이 감소가 초래된다.(주8) 1973년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무리한 중화학공업투자로 인해 자본의 생산성은 급격히 낮아졌고, 급기야 1979년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함으로써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박정희와 시장경제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들은 여러 가지의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는 개방정책을 쓰고 노동운동을 억제해서 시장의 원리가 작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화학공업으로 잘못된 투자를 유발했고 고교평준화를 강행했으며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해서 의료의 사회주의화를 시작한 장본인이다. 그린벨트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도시토지의 공급부족을 초래했고 그 결과 높은 땅값과 집값의 단초를 제공했다. 세상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그린벨트 제도처럼 엄격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반되고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의미는 그 이전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되어야 한다.
정조의 신해통공과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미미한 경제자유화 조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 자유화조치였다. 박정희 시대도 마찬가지다. 500년을 이어져온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미군정과 이승만 시절까지 이어진 중일 전쟁 이후의 명령경제체제를 극복하고 훨씬 더 많은 시장이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박정희 때이다.
박정희의 성공은 장하준 교수가 말하듯이 보호무역이나 관치 금융, 경제개발계획 같은 것이 아니라 개방과 시장, 계약 같은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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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하준(이순희 역), 나쁜 사마리안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부키, 2007, p. 32
2. World Bank, The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3. 이대근, 해방 후-1950년대의 경제: 공업화의 사적 배경 연구, 삼성경제연구소, 2002, pp. 123-24.
4. J. Yoo, How Koreas Rapid Export Expansion Began in the 1960's: The Role of Foreign Exchange Rate, Working Paper 08-18, KDI School of Public Policy and Management, 2008.
5. Yoo(2008).
6. Yoo(2008), p. 19
7.김광석·웨스트팔 (공저), 『한국의 외환 무역정책』, 한국개발연구원, 1976
8. 유정호(2009), pp. 8-14.
글/김정호 자유기업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