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산실] 이상수 맥간공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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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에 있는 이상수 공예가의 작업실 ‘맥간공예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에 들어서자 보릿대와 접착제가 뒤섞인 구수한 냄새가 훅 끼친다. 입구 한쪽에는 A4 크기부터 성인 키를 훌쩍 넘는 현판크기까지 크기가 제각각인 작품 여러 개가 늘어서 있다. 포효하는 호랑이와 여의주를 품은 용, 온화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 등 문양도 제각각이다. 8명 이상이 거뜬히 작업할 만한 기다란 테이블에는 그의 문하생 네댓 명이 작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30년간 일요일도 없이 작품만 하고 살았지요. 이제 문하생도 수십 명이고, 수강생까지 합치면 2만 명이 넘어요.” 이른바 ‘맥간공예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는 1970년대 말부터 맥간공예 보급에 힘써왔다. 맥간공예란 보릿짚 줄기, 즉 보릿대를 의미하는 ‘맥간(麥稈)’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보릿대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둥글고 길쭉한 보릿대를 납작하게 펴서, 도안 위에 하나하나 이어붙인 뒤 7차례에 걸쳐 옻칠한다. 보릿대 특유의 결을 살려, 결 방향을 엇갈리게 해 광채와 입체감을 살리는 게 포인트다. 접착료 색에 따라 보릿대의 빛깔에 농도를 주되, 화학적 염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빛을 받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맞물리고, 엇갈린 결은 자연 그대로의 색과 윤곽을 다채롭게 뿜어낸다. 오래 봐도 싫증 나지 않는 수수한 멋은 이 공예가가 꼽는 맥간공예의 매력이다. 자연물을 이용한 작품에 관심을 두다 보릿대를 발견했다는 이 공예가는 맥간공예 기법을 연구하는데만 3년을 넘게 보냈다. 이후 1983년 첫 실용신안을 딴 이래, 맥간공예 기술에 관한 실용신안을 연달아 따 내면서 현재 특허 5개를 보유하고 있다. 1986년 수원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 개인전만 7회를 여는 등 맥간공예를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회에서 선정한 ‘제30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전통연희부문을 수상, 맥간공예를 엄연한 예술장르로 올려놨다.
이 공예가는 공예를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으로 도안 디자인을 꼽는다. 수개월간 이어지는 작업기간 중 도안 창작에만 절반 이상이 소요될 정도다. “기존의 문양으로 작업할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밑그림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야만 작가의 마음이 작품을 통해 전달된다고 보니까요. 맘 속 형상들을 끄집어내 실체화하는 게 간단치는 않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작업이죠.” 그는 동양의 ‘기(氣)’를 도안 디자인의 기본으로 두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는 모두 기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를 문양으로 잘 담아낼 시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전달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공예가는 강함과 부드러움, 그 외의 내면으로 기를 나눠 표현한다. 용과 봉황, 호랑이로 강한 기운을 거세게 내뿜는가 하면, 여성, 반가사유상, 꽃과 새로는 부드러운 기운을 담아 보는 이를 어루만지며, 옛 고서적의 글귀를 옮겨 내면의 깊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나무판을 까만 바탕으로 삼아 누런 보릿대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도 기를 최대한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천자문을 따라 까만 하늘과 누런 땅을 작품에 담았다는 그는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기운을, 세상의 축소판인 맥간공예 속에 녹여낸다고 전한다. ■금박공예로 되살아나는 맥간의 가치 “맥간공예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안다고 해도 보릿대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저렴하게 생각하죠. 이 같은 편견을 깨고자 금박공예를 시작했어요.” 이 공예가는 맥간공예에 이어 2년여 전부터 금박공예(조금박칠공예)까지 예술의 활로를 확대했다. 금속적 느낌이 나는 소재에 관심을 갖다, 실제 금을 이용해 공예에 도전하게 된 것. 금박공예는 1mm의 1천분의1인 미크론 단위의 얇은 금박을 맥간공예와 마찬가지로 도안에 접착해 만든다. 조형물 전체를 도금하는 것이 아닌, 금박원단에 무늬를 내는 기법은 이 공예가가 최초로 고안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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