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정조대왕 ‘초장지((初葬地)’ 밝혀지다

정조대왕 ‘초장지((初葬地)’ 밝혀지다

다양한 출토유물로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확인



11월 30일 오후 3시부터 비가 뿌리는 가운데 공개된 정조대왕의 초장지 발굴현장.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 발굴현장은, 그동안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있던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현장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영원)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 내에 자리했던, 정조대왕의 승하 후 처음으로 묻었던 ‘초장지’로 추정되어온 지점에 대하여, 지난 10월 24일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다.

이번 발굴현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궁중제례악에서만 사용하는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이 각각 명기로 제작되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궁중아악에서 사용하는 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무덤이 왕릉으로서의 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어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생각을 한다는 것.

다양한 출토유물로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확인해

그동안 정조대왕이 승하한 1800년의 초장된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다. 다만 2007년 정조대왕의 초장 왕릉의 재실터가 발견이 되었으며, 현재의 정조대왕과 효의왕후가 묻힌 건릉은, 1800년 정조대왕이 승하한 이후 1821년 왕비였던 효의왕후와 합장하기 위해 당초 초장지로부터 이장해 조성한 능이다.

현재 발굴지역은 초장지로 유력하게 지목되어 오던 곳으로, 이번 발굴결과로 인해 정조대왕의 초장지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발굴을 담당한 한기상 학예연구사(문화재청)는 “이번 발굴된 곳이 정조대왕의 초장지임이 틀림이 없다. 묘의 규모나 구조, 거기다가 모든 기록 등이 문헌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출토유물이나 여러 가지 사실들이 문헌의 기록과 동일하다는 것은, 이곳이 정조대왕이 승하 후 처음으로 능을 쓴 초장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철(凸)자형’으로 판 묘광 북편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출토유물로는 백자명기, 백자호류, 칠기함, 청동편종과 난간석의 하부 지대석 등이다. 이 중 뚜껑이 있는 단지인 유재호는 18세기 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로, 7개가 일괄로 부장되어 있었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조선 후기 왕릉의 조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발굴지역은 건릉과 구조에 있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왕릉의 내부구조, 부장 양상, 이장 당시의 상황까지 복원해 낼 수 있다는 것. 이 발굴로 인해 조선 후기 왕릉 연구의 새로운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지역을 돌아보고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염태영 수원시장은,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오늘날의 수원은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도시에서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80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승하를 하였다. 오늘 초장지가 이렇게 밝혀진 것이 한 없이 기쁘다’고 했다.

하주성(swinews@hanmail.net

정조대왕 ‘초장지((初葬地)’ 밝혀지다

다양한 출토유물로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확인



11월 30일 오후 3시부터 비가 뿌리는 가운데 공개된 정조대왕의 초장지 발굴현장.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 발굴현장은, 그동안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있던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현장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영원)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 내에 자리했던, 정조대왕의 승하 후 처음으로 묻었던 ‘초장지’로 추정되어온 지점에 대하여, 지난 10월 24일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다.

이번 발굴현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궁중제례악에서만 사용하는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이 각각 명기로 제작되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궁중아악에서 사용하는 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무덤이 왕릉으로서의 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어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생각을 한다는 것.

다양한 출토유물로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확인해

그동안 정조대왕이 승하한 1800년의 초장된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다. 다만 2007년 정조대왕의 초장 왕릉의 재실터가 발견이 되었으며, 현재의 정조대왕과 효의왕후가 묻힌 건릉은, 1800년 정조대왕이 승하한 이후 1821년 왕비였던 효의왕후와 합장하기 위해 당초 초장지로부터 이장해 조성한 능이다.

현재 발굴지역은 초장지로 유력하게 지목되어 오던 곳으로, 이번 발굴결과로 인해 정조대왕의 초장지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발굴을 담당한 한기상 학예연구사(문화재청)는 “이번 발굴된 곳이 정조대왕의 초장지임이 틀림이 없다. 묘의 규모나 구조, 거기다가 모든 기록 등이 문헌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출토유물이나 여러 가지 사실들이 문헌의 기록과 동일하다는 것은, 이곳이 정조대왕이 승하 후 처음으로 능을 쓴 초장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철(凸)자형’으로 판 묘광 북편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출토유물로는 백자명기, 백자호류, 칠기함, 청동편종과 난간석의 하부 지대석 등이다. 이 중 뚜껑이 있는 단지인 유재호는 18세기 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로, 7개가 일괄로 부장되어 있었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조선 후기 왕릉의 조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발굴지역은 건릉과 구조에 있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왕릉의 내부구조, 부장 양상, 이장 당시의 상황까지 복원해 낼 수 있다는 것. 이 발굴로 인해 조선 후기 왕릉 연구의 새로운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지역을 돌아보고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염태영 수원시장은,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오늘날의 수원은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도시에서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80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승하를 하였다. 오늘 초장지가 이렇게 밝혀진 것이 한 없이 기쁘다’고 했다.

하주성(sw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