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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판화계의 거목 홍재연

국내 판화계의 거목 홍재연
2011년 12월 08일 (목) 성보경 기자 boccum@kyeonggi.com

미술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게 어쩐지 서먹서먹하더라는 말이 와 닿았다. 귀를 기울일수록 좋아하는 일, 또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게 맞는 길을 찾기는 쉬웠지만, 이후의 여정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척박한 국내 판화시장에 머물길 고집하고, 꾸준히 작품을 창작했다. 30여 년간 찍고, 그려낸 작품이 1천857점. 작가로서 향하는 장거리 레이스에서 수십 년 간 유지해온 페이스만큼은 비길 데가 없다. 아는 이도, 알아주는 이도 없는 길을 은근하고, 성실하게 다져낸 작가. 국내 판화계의 거목 홍재연(64)을 만났다.

느릿하고 조용하지만, 흔들림없는 말투가 작가관과 닮았다. 정년 퇴임을 1년 앞둔 미대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하며 매주 한 점 이상씩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판화와 유화를 함께 작업하고 있지만, 판화의 희소성 때문인지 판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어수룩한 소년의 판화 입문기
“판화부터 비구상까지, 웬만한 그림은 학창시절에 다 배웠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꾸준히 해온 미술반 활동이 자연스레 작가로 이어졌다. 특히 서울 휘문중·고등학교 시절 6년간의 영향이 컸다. 열성적인 미술교사는 일반적인 수채화, 데생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학생을 참여시켰다. 특히 단순히 보고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상상을 작품에 담아내게끔 도왔다. 네모꼴로 사람을 그려봐라, 세모꼴 꽃을 그려보라는 식이었다.
“머릿속에 만들어지는 풍경을 그려내는 게 재밌었죠. 방식이나 기법에 대한 고민없이 즐겁게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미술실에 갑자기 인쇄용 기계가 들어온다. 명함 찍는 데 사용되던 것으로, 평판화를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기계였다. 판화는 판의 종류에 따라 볼록·오목·평·공판화로 나뉘는데, 홍재연은 이때 처음으로 데생과 농담표현이 가능한 평판화를 만나게 된다.

“굉장히 신비로웠고…. 평판화하는 과정을 선생님이 보여주시는데, 아주 기가 막혔어요. 선생님 기계라 감히 만지지도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평판화를 해보리라 마음먹었죠.”

-경상북도 상주 출생
-경희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 32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단원미술대전, 무등미술대전, 경기미술대전, 한국 현대미술 100인 초대전, 한국 우수판화가 작품전 등
-체육부장관 문화상 수상
-현 경기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인쇄소에서 판화를 배우다.
1967년 경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에서는 볼록판화인 고무판화 몇 번 하는 게 고작이었다. 졸업 후 서울 인창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판화의 세계에 진입한다. 1980년대 초반. 미술대학에서 배울 수 없던 판화를 배운 곳은 청계천 인쇄 골목이다. 인쇄소가 즐비한 거리를 누비며 각종 인쇄물을 그대로 되 뱉어내는 기계를 열심히 탐구했다.

평판화는 석판, 금속평판 등에 물과 기름의 섞이지 않는 원리를 이용해 찍어내는 판화다. 고, 농담이 표현된다는 게 특징. 홍재연은 반년 여 간 인쇄 골목에 매일같이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며, 판화공부에 나섰다. 두 달 월급을 털어 평판화하는 데 쓸 명함 인쇄기를 미술실에 들이고, 평판화 연구를 시작했다. 판화에 대한 서적도 없던 시절, 영어로 된 원서를 빌려 사전과 씨름하며 공부하고, 실전에서 막히는 부분은 인쇄소의 작업꾼에게 배웠다.
“실전에는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때 고생했던 게 개인적인 보람이죠.”

■평판화의 매력 속으로
1983년 처음 평판화 개인전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상이 제대로 나오고, 상과 그림이 확연히 분리되는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이후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한편 날카롭기도 한 선의 표현. 어떨 때는 단순하기도 하고, 농담이 있어 유화적인 느낌까지 나는 것이 평판화만의 매력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판화로 찍었을 때 나오는 맛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요. 유화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맛이에요.”
판화만의 맛과 멋에 흠뻑 빠져 수십 년간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지만, 열악한 국내 판화시장에서 작업하기는 어렵기만 하다. 작품의 특이성과 희소성에 높은 가치를 매기는 시장 특성상 여러 장씩 찍어내는 판화작품은 구매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판화 한 작품당 150~200장씩 찍어내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이의 10분의 1수준인 20여장만 찍어내고 있다.

“판화는 예술적 측면 외에도 테크닉적인 면이 강조가 많이 돼요. 물이 흘러내리거나, 밀려나오지 않게 해야 되고, 찍어낼 때의 힘을 조절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그림을 그릴 때 두께 감이 최대한 없도록 해야 하는 등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죠. 예술과 기술을 두루 갖춰야 판화가 완성되는 건데 말이에요.”
작품에 들이는 공과 품에 비해 대우가 한참 떨어지는 데 홍재연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판화 한점의 값은 유화 작품의 절반의 또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작가는 판화만의 멋을 알면, 그에 대한 가치도 알 것이라고 여기며 묵묵히 작업을 이어갈 따름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깨달음
홍재연은 단순한 형태 혹은 무형(無形)으로 표현한 작품을 통해 대중과 빠르게 소통하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작가 개인의 정신 속에 잠든 경험과 가치를 꺼내놓는다. 서서히 형상을 나타내면서 인간적인 모습을 구사하게 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내면을 구체화할 형상을 찾아낸 그는 마침내 ‘부도’라는 형상에 자신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최고의 미(美)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들었다. 누구는 희생이라고도 하고, 봉사라고도 하는데, 나는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어느 절에서 오래돼 이끼가 낀 부도를 봤다. 가장 아름다운 건 깨달음이라는 것, 그것을 부도로 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하게 됐다”

70년대 후반 결심했던 것이 작업으로 나온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형태가 만들어지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것. 석탑, 석종 등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부도의 형상은 그의 작품 속에서 소박하고, 객기 없이 담겨 있다.
홍재연은 순간의 깨달음, 문득 알게 되는 이치, 그럴 때 느끼는 행복감을 최고의 미로 여기며 찍고, 그린다. 뭔가 떠오를 때마다 스케치하는 습관 덕에 끊길 틈 없이 해온 작업은 이제 2천 점을 향해간다. 현재 경기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으로 퇴임을 1년 앞두고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예술가가 하는 건 창작이죠. 좀 더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어요. 어디서 본 듯한 작품이 아닌 진짜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합니다. 고민되는 게 많지만, 행복한 고민이죠.”
신선한 작업을 위해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스승 없는 판화계에 흥미 하나로 뛰어들어 국내 판화계를 세워낸 그가 또 어떤 모험에 도전할지 궁금하다.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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