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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박태준` 누구인가외 기사 모음_중부일보

'정치인 박태준' 누구인가외 기사 모음_중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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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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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박태준' 누구인가
데스크승인 2011.12.14

유명을 달리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일뿐 아니라 '정치인 박태준'으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4선(11, 13∼15대) 국회의원에 구 민정당 대표위원, 구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 등이 그가 남긴 정치적 흔적이다. 다만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육사 6기 출신으로 1961년 5ㆍ16 쿠데타로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잠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 명예회장은 대한중석사장을 거쳐 1968년 포항제철 사장을 맡아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불모지였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박 명예회장이 정계에 본격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당선되면서부터다.
 포항제철 회장을 유지하면서 박 명예회장은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며 정치 전면에섰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며칠만에 이뤄진 '3당 합당' 이후 시련을 맞았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이다.
 박 명예회장은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밑에서 최고위원직을 맡았으나,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의 대통령선거 공약화를 요구하다 YS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난관에 직면했다.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포항북구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복귀했다.
 그는 1997년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이른바 '도쿄 회담'을 계기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해 11월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자민련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입지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자민련의 목표이자 'DJT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의 연결고리였던 내각제 개헌이 유보되는 좌절감도 맛봐야 했다.
 영욕을 거듭한 끝에 박 명예회장은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다.
 박 명예회장은 총리 취임과 동시에 '경제 총리'로서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과 4개월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자 사퇴한 것이다.
 총리직 퇴임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계 복귀 가능성이 꾸준히 점쳐졌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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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태준 명예회장 연보
데스크승인 2011.12.14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다음은 박 명예회장의 출생에서 타계까지 연보이다.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4년(17세) 일본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 결심
 ▲1946년(19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마치고 중퇴
 ▲1948년(21세) 귀국 후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남조선경비사관 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로 박정희 당시 대위와 첫 대면
 ▲1953년(26세) 육군중령으로 5사단 참모. 5사단의 지리산잔비 토벌작전을 위한부대이동작전 수립 뒤 11월 육군대학 입교
 ▲1954년(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장옥자와 결혼
 ▲1957년(30세) 박정희 장군(1군단 참모장)과 재회
 ▲1961년(34세)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 중 5.16 발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1963년(36세) 미국 유학 준비, 육군소장으로 예편
 ▲1964년(37세)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 포기,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령
 ▲1965년(38세) 일본 최고 제철소 가와사키제철소 견학, 종합제철 프로젝트에 관심
 ▲1967년(40세)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 박정희의 '제철공장 완수'특명
 ▲1968년(41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 확정(영문 약자표기 'POSCO'), 초대 사장 취임
 ▲1969년(42세) 차관 도입 무산, 대일청구권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 추진 ▲1970년(43세) 포항1기 건설착공, 열연공장, 중후판공장 착공
 ▲1971년(44세) 제선공장, 제강공장 등 주요 공장 착공
 ▲1972년(45세)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 준공, 첫 제품 출하
 ▲1973년(46세) 제1고로 첫 출선 성공, 일관.종합제철공장 완공(연산 조강 103만t 체제), 포항2기 건설 종합착공
 ▲1981년(54세) 포철 초대 회장 취임,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비례대표 당선
 ▲1985년(58세)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착수
 ▲1990년(63세) 민정당 대표 취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 최고위원 취임
 ▲1992년(65세) 광양 4기 설비 종합준공
 ▲1993년(66세) 해외 유랑, 포철 세무조사로 본인, 가족, 친인척, 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
 ▲1997년(70세) 5월초 귀국, 포항 북구 보궐선거 당선, 김대중-김종필(DJP) 연대, 자민련 총재 취임
 ▲2000년(73세) 자민련 총재 사퇴, 국무총리 취임과 사임, 포철 민영화 완료 ▲2001년(74세) 폐 밑 물혹 제거수술, 포철 명예회장 재위촉
 ▲2005년(78세) 포스코청암재단 확장 설립
 ▲2008년(81세)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현)
 ▲2011년 12월 13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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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신화 철강왕' 박태준 前총리 별세
영욕의 84년..'철의 사나이' '군부정치인' 이미지 겹쳐
한국 철강산업 반석 위에..포스코의 '시작과 끝'
데스크승인 2011.12.14
▲ 13일 별세한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은 1992년 1월1일 민자당 단배식에 참석한 모습.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5시께 지병인 폐질환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이 입원, 치료를 받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포스코 측은 이날 그의 타계를 공식 확인했다.
 유족 측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임시빈소를 마련한 뒤 장례절차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다. 다만 고인은 총리를 지냈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고인은 지난달 9일 호흡 곤란으로 흉막-전폐절제술을 받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고인은 수술 후 회복될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에도 이달 5일 급성 폐손상을 겪으며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받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번 수술은 10년 전에 흉막 섬유종으로 미국 코넬대병원에서 종양 제거수술을 받은 후유증 때문에 시행한 것이었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포철 신화'를 이뤄낸 '철강왕'인 동시에 5.16 군사쿠데타 세력으로 분류되는 군부 정치인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로 대중에 각인돼 있다.
 일본 와세다대(중퇴)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를 거친 뒤 1961년 쿠데타 이후에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 그러면서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 드라이브를 주도하게된다.
 결정적으로 대한중석 사장을 지내던 중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1968년 포항제철 사장으로 지명돼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일본 철강업계의 선진기술 도움과 대일 청구권 자금에 기대어 포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이끌면서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인은 '철강왕'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는 1980년대 이후에는 민정당(11대.81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한다.
 13, 14, 15대 국회를 거쳐 1990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으로 3당 합당에 의한 민자당 창당을 맞는다.
 그러다가 김영삼정부 출범후 당시 김 전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며 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듬해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까지 되고는 4년간의 일본 망명생활을 지내고 1997년 국회의원으로 컴백한다.
 이어 고인은 자민련 총재로 영입된 뒤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정부 시절(2000년) 공동정부의 자민련 몫으로 총리까지 지냈으나 부동산 투기문제가 불거지면서 단명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80) 여사와 1남4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