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찬 (수원한의사회 회장)
벌써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여기저기 송년모임에 참석하느라 마음도 몸도 분주해지는 달이다. 음력으로 12월을 섣달이라 하는데 섣달의 다른 이름이 '납월(臘月)'이다. 신년이 되면 지나간 달, 곧 12월을 일컬어 구랍(舊臘)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난 납월'이라는 뜻이다. 다음 주에 맞이할 동지(冬至) 다음 세 번째 맞는 미일(未日)이 납일(臘日)이다.

납일에 내린 눈을 곱게 받아 깨끗한 독 안에 가득 담아 두었다가 약으로 사용하는데 이를 납설수(臘雪水)라 한다. 김장독에 넣으면 맛이 변하지 않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안질을 막고, 납설수를 뿌린 책이나 옷에는 좀이나 벌레가 생기지 않아 오래 보관해야 할 환약을 빚는 데 사용한 것이다. 납일에 납설수를 사용하여 궁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환약을 지어 임금님께 진상하고, 임금은 다시 이 약을 가깝거나 공이 큰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것을 '납약(臘藥)'이라 한다.

납약에는 여러 가지 약들이 있었으나 대표적으로 청심환(淸心丸)·안신환(安神丸)·소합환(蘇合丸) 등 구급약이 유명했다.

청심환은 중풍 인사불성 등 구급치료에, 소합환은 곽란을 다스리는 데, 안신환은 열성경련과 간질발작 치료약으로 쓰였다. 특히 조선의 우황청심환은 그 효능이 뛰어나 중국의 고관대작들도 앞다투어 구하고 싶어 하는 약이었다. 따라서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가는 사람들은 조선의 우황청심환을 으뜸 가는 선물로 준비하려 했을 정도였다. 소합향원 혹은 사향소합원으로 불리는 소합환도 일체의 기질(氣疾)을 다스리는 데 좋은 약이었으나 당시에도 구하기 쉽지 않은 귀한 약재인 사향이 들어가는 처방이었던지라 한의학에 밝은 정조대왕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1790년(정조 14)에 소합환보다 더 효능이 뛰어난 제중단(濟衆丹)과 광제환(廣濟丸)이라는 환약을 새로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제중단은 찬 음식을 먹고 곽란을 일으켜 토하거나 설사하는 등의 증상에 구급약으로 쓰거나 여러 가지 음식으로 인한 배앓이에 효과가 좋은 약이다. 일반적으로 납약은 진귀한 약재들로 구성되어 약을 만들 수 있는 양이 한정되었기에 궁중의 근시와 지밀나인들에게 한 명당 2~5환 정도 나누어 주는 수준이었으나, 정조대왕은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약재로 구성한 제중단을 만들어 궁중의 신하들은 물론이요 화성건설에 참여한 일반 백성들과 장용영 군사들에게도 하사하도록 하였으니 한의학에 심취하였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들을 두루 사랑한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는 매우 훌륭한 예라 하겠다. 또한 원로대신들이 모이는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납약을 지어 여러 기신(耆臣)에게 나누어 주고, 각 관아에서도 환약을 지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내의원의 납약 처방을 공개하게 명하여 어의 '강명길'의 <제중신편>에 수록하였으니 바야흐로 궁중의학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 처방들은 방약합편의 '입효제중단', '천금광제환'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내의원에서는 효과 좋은 한약을 만들어 임금님께 올리고, 임금님은 그 약을 국가원로들에게 하사하여 지난 일 년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군신간의 신뢰를 돈독히 하는 '납약'과 같은 아름다운 관행이라면 오늘날에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