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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민국의 위대한 별 박태준회장의 발자취

스크랩] 대한민국의 위대한 별 박태준회장의 발자취

|자유게시판 (+ 공지)

심심한해풍 | 조회 20 |추천 0 |2011.12.15. 09:56 http://cafe.daum.net/parkgunhye/U8YZ/451411

'포철' 밑거름이었던 朴泰俊

朴正熙 대통령의 因緣

1970년 4월 1일 거행된 포철1기 공사 착공식. 오른쪽부터
김학렬 부총리, 박정희대통령, 박태준사장이 버튼을 누르고
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하 박태준)의 ‘철강 신화’ 이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박태준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직후인 1948년. 당시 육사 탄도학(彈度學) 교관을 맡았던 박정희는 수학에 강하고, 자기 규율에 엄격한 박태준을 눈여겨봤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5시께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시찰하는
박태준 회장 모습
박태준의 졸업을 끝으로 헤어졌던 두 사람은 10여년이 지난 후 재회했다. 박태준이 육군본부 인사과장(대령)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참모장으로 나를 보좌해 달라”고 요청했고, 박태준은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강한 자제력, 완벽주의, 직선적 성격 등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었던 두 사람은 이 시기에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2군수 사령관 박정희가 박태준을 시험하기 위해 박태준에게 다음 날 아침 군수본부 장비계획을 보고하게 한 뒤, 부하들을 시켜 그날 밤 박태준에게 술을 잔뜩 먹였다. 그러나 ‘말술’이었던 박태준은 박정희의 부하들이 만취해 모두 귀가할 때까지 자리를 지킨 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작성, 다음날 아침 약속한 시각에 사령관실에서 박정희를 기다렸다가 차질없이 보고를 올렸다. 당시 박정희는 박태준을 ‘무쇳덩어리’라고 부르며 만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준비하던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자는 일에 참여하지 말고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


박태준에 대한 박정희의 신뢰가 드러나는 대목. 그러나 박태준은 5·16 당일, 박정희의 지시를 어기고 박정희 세력의 지휘부에 불쑥 합류함으로써 박정희의 지시를 어겼다.

군사정부 수립과 함께 박종규·김종필 등 모든 측근이 정치권으로 나갔지만, 박태준은 기업체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에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철’이 필수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종합제철소’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프로젝트의 실행을 맡은 인물은 박태준이었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채 안 되는 한국에 선뜻 ‘제철소를 만들라’며 차관을 제공하거나 기술 이전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국가나 기업, 개인이 있을 리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간신히 미국으로부터 투자 약속을 받아냈다. ‘먼저 공장을 지으면 차관단이 돈과 기술을 빌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이 포항 영일만에 부지를 마련하자, 미국 측이 차관 제공 약속을 깨버렸다. 후진국 한국의 제철사업에 회의를 품게 됐던 것이다. IBRD(세계은행)가 미국의 수출입은행에 제출한 보고서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보고서에는 “한국은 노동기술 집약적인 기계공업을 먼저 하는 게 좋다”고 적혀 있었다.

망연자실해 있던 박태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 1억 달러였다. 이 돈은 당초 농업 분야에만 쓰기로 약속됐었지만, 이를 제철소에 전용(轉用)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박태준은 박정희를 설득해 일본을 방문했고, 결국 대일청구권자금 중 농업에만 쓰기로 했던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회담을 성사시켰다. “제철소 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이며, 한국이 적화하면 일본에도 손해”라는 논리를 폈던 게 주효했다.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당기
는 박정희 대통령. 자본도 기술도 없이 추진한 제철사업은 정
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25년 후 포철은 조강 규모 2천8백만
톤의 세계2위 철강회사로 성장한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기술이전’이었다.
박태준은 일본의 3대 철강회사 사장과 소유주를 막무가내로 따라다니며 기술 이전을 조르기 시작했다. 박태준은 자신의 방일(訪日) 일정에 맞춰 휴가를 떠나버린 철강회사 소유주들을 휴가지까지 따라다니며 읍소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서도 ‘어차피 한국이 일본의 경쟁상대로까지 크기는 어려울 것이고, 가까운 나라에서 철강 산업과 경제가 일어났을 때 인접국으로써 얻는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박태준은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제철소 건설 계획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주위에서는 이권을 둘러싼 이런저런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제철소 부지 인근 아파트 건설 사업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박태준은 ‘허허벌판인 영일만에 유능한 엔지니어와 관리직 사원들을 끌어들이려면 훌륭한 생활 여건을 먼저 마련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왜 공장이 돌아가기도 전에 근처에 아파트부터 짓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권을 둘러싼 음모론이 판을 치면서, 정보기관은 가택 수색도 수차례나 받았다.

견디다 못한 박태준이 결국 사의(辭意)를 표하자, 박정희는 종이에 친필로 박태준에 대한 지지 의사를 적어 그에게 건넸다. 박태준이 박정희의 뜻으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종이 마패’였다. 이와 함께 포항제철의 인사 및 경영에 대한 전권도 박태준에게 줬다.

이때부터 박태준은 오직 제철소 건설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제철로써 나라에 보답한다)', '우향우 정신'(포철을 성공하게 하지 못하면 오른편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는 각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일에 매진했고, 기둥 하나가 잘못 세워질 때마다 가차없이 폭파시키는 그의 완벽주의 속에 제철소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6월 9일 구호들은 모두 현실이 됐다. 마침내 제 1고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3배가 넘는 1215억원이 든, 유사 이래 최대의 사업은 이렇게 완성됐다.
미국의 제철소 차관 제공을 만류했던 IBRD 보고서의 작성자, 지페 박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 보고서가 틀렸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보고서를 쓰라고 해도 똑같은 보고서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박태준입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박태준과 포철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박태준 보고서]

92년10월3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박정희 대통령 묘소 참배문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 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활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 시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 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 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 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 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 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열세 차 례에 걸쳐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6대 철강대 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명이 땀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새로울 뿐입니 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다만 머리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각하!

염원하시던 '철강 2,000만톤 생산국'의 완수를 보고드리는 이 자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던 근영·지만군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녀분들도 이 자리를 통해 오직 조국근대화만을 생각하시던 각하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 기며, 각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더욱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라 맏습니다. 저 또한 옆에서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잔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 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전의 그 마음으 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업드려 바라오며, 삼 가 각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올림

<포항제철 야경>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천지구 황해도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