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월은 서른날이요 소월은 다 이십구일
금하 금년 열두달에 달로는 ○○달이요
날로는 ○○일이라
해동은 조선국이요 경기좌도는 삼십칠관
스물여덟을 마련하여 광화는 일품, 광주는 이품
수원은 정삼품이라
안산은 군수 수령 내명은 부사또라
용인은 수령 동에 양안성 금과천 꽃대주요
홍천릭에 빛갓을 날렵하게 눌러쓰고 활을 손에 들고, 판배개 창이라는 경기도 특유의 창법으로 소리를 하던 오수복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기예능보유자로 1990년에 지정을 받았다.
정신대로 끌려가느니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성화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후 일찍 남편과 사별을 하였다. 많은 식솔들을 혼자 감당하던 오수복 선생은, 나이가 먹어 경기도 지역의 큰만신으로 명성을 얻은 이가보 만신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그 뒤 대를 잇는 화랭이 집안의 고 이용우 선생에게서 경기도당굿을 익혔다.
경기도의 큰 선생에게 배운 학습
쉰살 부채와 일곱쇠 방울을 들고, 머리에 고깔 쓰고 흰 장삼을 떨쳐입고 소리를 한다. 1924년 용인 역북리에서 출생을 하여 18세에 출가, 수원에서 평생을 보낸 오수복여사는 32세에 당대에 명성을 얻던 이가보에게서 내림굿을 받고, 전통적인 경기도 굿을 지켜가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긴 세월이었던가?
“당시 이가보 선생이 얼마나 대단하셨던지 ‘떳다하면 가보, 돈 잘번다 가보’라는 유행어가 나 돌 정도였으니 알만 하죠”. 그렇게 큰 선생 밑에서 경기도 전통 굿에 대한 모든 학습을 마치고 이가보 선생이 타계하자, 선생 뒤를 이어서 6대째 세습무가의 맥을 잇고 있던 화랭이 이용우선생과 함께 굿판에 들어섰다.
평소 성격이 곧기로 유명했던 이용우선생은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었다. 완벽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학습을 시켰다. “참 대단한 분이셨어요. 굿판에 들어가셔도 농을 허락치 않는 분이셨죠.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국립국악원 무대에 초청을 받아서 함께 공연을 하러 다니기도 하고, 경기도에 수많은 도당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데 얼마나 엄하셨던지…”. 채 말끝을 잇지 못하고 저고리 고름으로 눈가를 훔치시는 오수복 선생.
“1990년 경기도당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는데 지정받기 전해인 1989년에 갑자기 사고를 당하셔서…. 보유자 인정서를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것은 제가 받을 것이 아니고 선생님이 받으셔야 할 것인데…”.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도당굿
오수복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고 나서, 그동안 전국을 다니며 수많은 행사를 가졌다. “도당굿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굿이 재미없다고 하죠. 소리도 이 쪽 판소리로 되어있고, 한양굿이나 이북굿처럼 뛰는 것도 없어서 그래요.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도당굿이 전국에서 최고라고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있어요. 한 마디로 멋이 철철 넘치는 굿이 바로 경기도 굿이거든요”.
경기도당굿은 소리, 춤사위, 장단, 굿에서 사용하는 음악 등이 독창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도당굿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는 굳이 되새길 필요가 없다. 도살풀이, 태평무 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무용이 도당굿의 장단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터벌림, 진쇠춤 같은 많은 춤들이 도당굿을 모체로 창출되었다.
평생을 도당굿을 위해 몸을 바친 오수복 선생. 향년 88세의 나이로 12월 17일 새벽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 온갖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지켜온 경기도당굿. 이제 선생이 떠나는 먼 길에 벗이라도 될 수 있으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