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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시장 기획연재] `선비상인, 유상의 뿌리를 찾아서`

[팔달문시장 기획연재] '선비상인, 유상의 뿌리를 찾아서'
(1) 양반도 장사를 하라! 양반상인론의 제안자 유수원
2011년 12월 20일 (화) 편집부 suwon@suwon.com

본 연재기획은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 2011년 팔달문시장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수원팔달문시장의 유래를 찾아보는 4부작 역사 기획물이다. 18세기 정조 시대. 당시 정계에 화두가 된 ‘양반상공인론’의 뿌리를 찾아, 조선 후기 시대의 사회상과 그 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조대의 실학자들의 면면들을 소개한다. 이는 선비 상인 '유상'의 탄생은 단순히 정조만의 의지가 아닌 '시대적 부름'이었으며,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선각자들, 그리고 그들과 뜻을 함께한 현군 정조가 만든 값진 시대 정신이었음을 증명한다. 조선 최초의 계획 시장인 수원 팔달문 시장은 그러한 선지자들의 결실임을 본 기획기사를 통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편집자주>

지난 12월 5일 우리나라 무역 규모가 세계에서 9번째로 1조 달러를 돌파하였다. 김영삼 정부시절 경제대국 모임인 OECD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실제 경제대국인지 찜찜했었는데 이제 마침내 1조 달러 그룹에 들어갔으니 가히 경제대국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1조 달러 그룹의 특징은 바로 무역 규모에 있는 것이다. 즉 전 세계에서 무역을 많이 하는 나라 9번째가 된 것이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남북이 분단되어 반쪽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전 세계의 으뜸 무역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단군 이래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역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바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한반도안에서 장사는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무역 자본가인던, 아니면 중소 자본가이던, 그도 아니면 평택항의 보따리 장사이던 우리의 물품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 팔고, 또 그 나라의 좋은 물건을 우리 땅으로 가져와 파는 장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사를 너무도 잘해서 세계의 9번째 무역 1조 달러가 넘어선 것이다. 물론 이 안에는 우리가 손해보는 장사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장사를 하여 국가의 경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랑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중의 하나가 무역업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무역을 담당하는 종합상사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입사하고 싶은 업종이었고, 지금도 무역 즉 교역을 담당하는 직장은 선호의 대상이다. 즉 장사하여 이문을 남기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선호하는 무역, 즉 장사를 우리 옛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글쎄!’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 장사의 개념은 형편없이 천대받았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무역, 즉 장사는 국가에서 권장하는 사업이었다. 김해 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후와 결혼을 하고,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귀족이 되었다가 국왕이 된 것은 바로 무역업의 성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개성에서 흘러나가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중심 상인이 유럽으로 진출하여 ‘안또니오 꼬레아’란 이름으로 세계 무역상의 위대한 인물이 된 것도 바로 장사를 천대하지 않고 높이 받들어서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갑자기 장사, 즉 상업은 천대받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을 공부한 양반들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너무도 강해졌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는 천한 인물들이 하는 것이기에 성리학을 공부한 문반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예를 익힌 무반, 즉 양반들은 절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굶어 죽으면 죽었지 가장인 양반의 후예는 절대 책을 놓아서는 안되고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당시 기득권자인 양반들은 자신들의 여자도 세뇌시켰다. 여인들이 해야 할일은 바로 남편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이 굶을 처지에 있더라도 남편은 비단옷을 입고 밖에 나가 학문을 논해야지 어찌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조선시대 양반 여인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길쌈을 하면서 남편의 공부, 아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위도식을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공리공론만이 우선시되어 당쟁이 격화되고, 산업은 발전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끝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문집에 나오는 가난한 선비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도 없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흥부전만 보아도 된다. 사실 흥부는 양반의 자손이었다. 그가 양반 출신인 것이다. 형 놀부는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호의호식하고 동생 흥부는 아무 재산도 받지 못해 가난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흥부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던가 아니면 장사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일이라곤 형의 집에 가서 쌀을 구걸하거나 아니면 형수가 밥주걱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면 밥주걱에 붙은 밥을 흐뭇하게 먹은 것이 그의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강남 제비의 도움으로 큰 부자가 되었지만 만약 강남 제비의 도움이 없었다면 흥부의 가족은 굶어죽었을 것이다. 흥부전의 이야기 역시 양반들이 가난해도 절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고도의 세뇌교육이 밑바탕인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체계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중인이나 평민은 장사를 할 수도 있지만 양반들은 절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로 인하여 조선 건국 300여년이 지나도록 조선 땅에서 양반들이 상인이되어 나라의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다는 이야기는 금기의 언어였다.

이 금기를 깬 인물이 바로 유수원(柳壽垣)이었다. 유수원은 1694년(숙종20)에 유봉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종숙부가 영조년간 영의정을 지냈던 유봉휘이니 명문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본관이 문화 유씨는 당파적으로 소론이었고, 유수원의 소론의 중심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0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4살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유수원은 가히 천재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평균 합격 연령이 41세이니 24살에 합격한 것은 그가 뛰어난 자질과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소론의 명문가문 출신이지만 유수원은 기존의 성리학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국가의 지도자들이 기득권만을 유지한 채 살아갔기에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 역시 명문가의 후손이지만 자신과 같은 부류들이 국가를 망치고 백성들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자기 반성을 한 것이다.
나라가 왜 이리 어렵게 되었을까에 대한 고민을 그는 깊이 하였다. 그 결과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이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분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나라와 백성은 부국안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농공상이라는 편벽되고 고루한 강제성이 나라의 변화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학문에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양반 사대부들이 유생(儒生)이라고 자처하면서 온갖 편법과 협잡으로 벼슬자리를 구한 다음 권력과 세도를 부려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이러한 사회 현상은 양반 사대부는 양반 사대부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는 살려고 하지 않는 사회·경제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진실로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양반들에 대한 비판은 곧 양반들의 개혁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양반들이 말로는 물건을 만들고 상업 행위를 하는 것을 천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실제 행동은 장사치나 공장들보다 비루한 행동이 많다고 비판하였다. 실력도 없으면서 세력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글을 빌려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도 하고, 집안의 지위를 이용하여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에 나가고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로 직접 들어보자!

“양반들의 실제 비루한 행동은 장사치나 공장(工匠)들보다도 더한 것이 많다. 글은 몰라도 세력이 있으면 남의 글을 빌려서 과거에 오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음사(蔭仕)를 바라고, 방납(防納)을 청탁하여 구걸을 일삼기도 한다. 또 이러하지도 않으면, 빚을 놓아 이식을 키우고,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송사를 즐겨서 살아가기도 하고, 주현(州縣)의 수령이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착취, 전택(田宅)을 요구하며, 노비를 널리 차지함으로써 가업(家業)을 이루는 계책을 삼기도 한다. 이 모두가 도리에 어긋나는 무상(無狀)한 일이 아닌 것이 없다. 하지만 양반의 생계를 도모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어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것이 과연 마음가짐에 해로움이 없고 풍속에 도움이 되겠는가.”

유수원은 양반들의 개혁을 요구하고 새로운 사회 변화의 틀을 제시하였다. 그는 상업행위가 본래 말업이 아니고 원래부터 바르지 않고 비루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들이 몸소 수고하여 있고 없는 것을 유통시키고 교역(交易)을 이룩함으로써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진정 선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상공업 진흥책에서 양반이 부유한 상인이 되어(富商) 가난한 백성들과 함쳐서 상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상은 반드시 세약소민의 힘을 얻어야 상점을 개설할 수 있다. 부상이 혼자서 경영할 수는 없다. 대저 작은 것은 큰 것에 통합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사리상 떳떳한 일이다”라고 유수원은 강자와 약자가 서로 제휴하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함께 장사를 하여야 상업이 발전하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그의 생각은 흡사 요즘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자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상점을 만들어 안정된 물품을 공급하고, 수레를 이용하여 다량을 물품을 운송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대의 기업 경영 논리와 거의 같은 것이니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유수원은 귀머거리였다. 처음부터 귀머거리는 아니었지만 심한 병을 앓고 난 이후 귀머거리가 되었다. 고통받는 삶의 연속이었다. 소론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영조의 등극 이후 노론의 권력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어 온갖 박해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의 소리에 귀먹지 않았다. 오히려 배부르고 권력을 가지고 있던 양반들이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지도층은 지도층이 아니라 귀머거리 장애인인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귀머거리 장애인이었던 유수원은 백성들의 삶의 소리를 들었고 이를 자신의 평생의 역자 『우서(迂書)』에 담아 양반들의 상업행위를 강조하면서 국가 개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준혁 박사
실천적 개혁자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 유수원의 양반상인론이 마침내 세상으로 전해져 정조의 개혁사상에 담겨지게 되었고 팔달문 시장을 왕이 만든 시장, 양반상인론이 적용된 최초의 시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글=김준혁 박사(경희대학교 문학박사 교수·수원화성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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