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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7)] ‘수원도시계획 200년사’ 편찬이야기-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7)] ‘수원도시계획 200년사’ 편찬이야기-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승인 2021.05.03 06:00

 

김충영 도시계획학박사

'수원시 도시계획 200년사' 책 표지. (사진=필자 김충영)

새로운 2천년을 맞는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1999년은 신읍(현재 수원)건설 210년을 맞는 해였다. 새로운 세기를 맞기 위해서는 200년의 도시계획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새 천년을 맞는 도시계획을 제대로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의 구성은 신도시건설 210년의 자료를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첫째는 210년의 역사적 기록 중에서 도면과 사진을 수록하기로 했다.

화성전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 1796년. (사진=필자 김충영 )

둘째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와 지적도를 발굴해 시계열로 변화과정을 수록하기로 했다. 세 번째는 현존하는 수원의 항공사진을 발굴해 변화과정을 항공사진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도입했다. 네 번째는 1944년 일제 말기 최초로 수립된 도시계획부터 변경돼가는 과정을 도시계획도면과 해설을 덧붙이도록 했다.

집필은 수원 출신 도시계획전문가인 유완종 박사가 맡기로 했다. '수원시 도시계획 200년사'의 담당은 최호운박사(현 화성연구회이사장)였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최초 도시계획이 수립된 1944년 이후 도시계획서류를 모두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55년간의 서류를 모두 찾아 도시계획도면을 파악한 결과 아쉽게도 최초 도면이 발견되지 않았다. 수원시와 경기도, 건설부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수원시 도시계획 재정비 계획도(1961.8.8). 해방이후 최초로 수립한 도시계획 도면이다. (사진=수원시)

이후 시기에도 없어진 도시계획도가 있었으나 이들은 앞뒤의 도면이 있고, 도시계획변경 내용이 남아있어 도면을 재작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최초의 도면을 제외하고 도시계획도를 수집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일제초기부터 제작된 수원관련 지도와 항공사진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지도와 항공사진은 당시 수원 원천동에 소재한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의 고유 업무였다.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이 수원에 있어 수월하게 자료를 협조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국립지리원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사진이 1960년대 이후 자료만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시대의 항공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육군측지부대에서 군생활 할 때 항측과에서 근무하면서 항공사진을 본 기억이 나 육군측지부대를 찾게 됐다.

측지부대는 부산 광안리에 있었는데 대전으로 이전했다. 부대를 찾아가니 1976~1979년까지 군 생활 할 때 함께한 군무원들이 20년이 지났음에도 그대로 있었다. 수원시에서 수원도시계획 200년사 책을 만든다고 했다. 당시 군무원중 제일 지위가 높은 우병화 문관이 직원들을 불러 “김충영이 왔는데 수원시 사진을 모두 찾아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1947년, 1954년, 1966년, 1969년 항공사진이고 드디어 '수원도시계획200년사'에 수록하게 됐다. 1947년 항공사진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손된 화성일원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중 최고의 자료였다.

1947년에 촬영된 수원최초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도시계획200년사를 만들 당시 도시계획과에는 지적계가 있었다. 하루는 이광수 지적계장과 수원도시계획 200년사를 만드는 이야기를 하던 중 수원의 지적도 중 제일 오래된 지적도가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전 문서기록보존소에 아마도 1911년에 작성된 지적원도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장에게 출장을 다녀오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이 계장은 오래된 지적도 사본 몇 장을 가져왔다.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지적도는 한일 합방 다음해인 1911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조사,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만들기 위해 실시한 측량 원도였던 것이다.

1911년의 지적원도. (사진=필자 김충영)

지적원도는 평판측량을 할 때 평판에 붙여 측량한 원도이므로 자세한 기록을 해둔 것이 그대로 있었다. 1911년까지 성곽시설과 관청시설이 남아있는 곳에는 관(官)자를 기록해놓았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관 소유 토지는 5.7km의 성곽과 4대문, 성곽시설이 표기돼 있었다. 그리고 화성행궁, 화령전, 중영, 이아, 무고행각, 수직소, 수문청, 남지, 북지, 동지, 감옥, 종각, 그밖에도 학교, 연못, 종교, 사찰, 임야, 전, 답, 구거 하천, 도로 등을 기록해놓았다.

그리고 당시 지명도 표기해 놓았다. 군기동, 보시동, 산누리가 표기돼 있었다. 지적원도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기위해 만든 조선의 기초자료를 만든 것인데 여기에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11년 지적원도는 화성을 복원하는데 기본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됐다.

'수원도시계획 200년사'는 2000년12월 39×53c

m, 143쪽 책으로 출판됐다. 이 책 역시 1000부를 제작해 수원의 각 기관과 대학도서관 연구기관에 배부됐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2003년 초의 일이다. 나는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였다. 당시 경원대학교 이창수 교수로 부터 전화가 왔다. ‘수원도시계획200년사’를 가지고 도시계획학회로 올라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서 서울에 있는 건설회관내 도시계획학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도시계획학회 학술회 안건을 심의하고 있었다. 나를 찾은 것은 2002년도 학술상 대상을 선정해야 하는데 마땅한 대상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수원시 도시계획200년사를 만든 필자에게 상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로부터 받은 제20회 학술상장. (사진=필자 김충영)

이 자리에서 나는 "이 책은 수원시 도시계획과장이 주관하기는 했으나 개인이 받을 수 없다"고 답변 했다. 심사위원들은 그 말이 맞는다고 하면서 수원시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의결했다. 상을 주는 이유는 “우리나라는 230여 지자체가 있으나 수원시 같이 체계적으로 자료를 관리하는 곳이 없어 귀감이 돼 타도시들도 잘하라는 취지”라고 했다.

필자(가운데)가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로부터 제20회 학술상과 상패를 받고 있다.(사진= 수원시)

'수원시 도시계획200년사'는 전국에서 최초로 출판한 책으로 이후 다른 도시들도 유행이 돼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도시들은 도시계획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책 만들기를 포기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이제 '수원시 도시계획 200년사'는 수원의 도시계획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이 됐다.

'수원시도시계획 200년사' 편찬을 위해 고생을 하신 유완종박사, 최호운박사, 이광수 지적계장에게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특히 자료를 협조해준 국립지리원과 육군측지부대에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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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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