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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모 수원시 前 팔달구청장, 퇴임 마지막 인사…"시원섭섭합니다"

 

윤건모 수원시 前 팔달구청장, 퇴임 마지막 인사…"시원섭섭합니다"
[이슈&사람] 엄득호가 만난 윤건모 수원시 前 팔달구청장
데스크승인 2014.01.14  | 최종수정 : 2014년 01월 14일 (화) 00:00:01   
   
 

(38년 전, 약관 20나이에 까까머리 경기도지방공무원5급을류(지금의9급)공직 첫발)

명예퇴직서를 제출했습니다. 38년 전 청년이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으니 긴 세월이기도 합니다. 75년도 그 시기는 새마을사업, 식량자급을 위한 소출 1위 통일벼 심기운동 등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힘에 겨워 사직서도 내보기도 했고…. 안 가슴에는 항상 사직서가 들어 있기도 했죠. 이제 회한의 시간을 뒤로 하고 후배들에게 명예스럽지 못한 선배로 남지 않으려 노력은 해왔는데. 그래도 후회스러움이 밀려오네요. 이제 새로운 공간에서 제삶을 설계할까 합니다.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윤건모 수원시 팔달구청장)



최근 SNS에서 그가 밝힌 퇴임 인사말이다. 후배들과 동료 수백 명이 서운해 했고, 또 섭섭해 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수원시 후배들은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덕장 윤건모 구청장이 수원시를 떠난다. 경기도에 홍승표 부시장이 있었다면, 수원시는 윤건모 팔달구청장이 있었다. 그는 항상 후배들 편에 서 있었고, 또 수원시를 위해 고민했다. 때문에 윤건모 이름 석 자에 수원시를 느낄수 있었고, 또 마지막까지 팔달구청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

윤건모 수원 팔달구청장의 퇴임식이 있기 사흘 전(1월 7일). 팔달구청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간부회의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들어오는 그를 만나 2시간여 동안 SNS에서 담을 수 없던 38년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늘 간부회의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들었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올 초부터 내가 수원시에서 하고 있는 일 대부분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예요. 오늘도 마지막 간부회의를 마쳤고, 어제는 마지막 업무보고를 들었고… 내일은 구청 직원들과 마지막 부서 식사를 해야 하니까요. (하하)”



―공직생활을 몇 년동안 하신건가요?

“38년을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니까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같은 해 10월 달 경기도에서 공채 모집하는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회고를 해보면 당시 시험을 본 곳이 영복여고였어요. 아마 처음 개교할 때로 기억합니다. 여자고등학교라 그런지 모든 자리에 방석이 가지런히 놓여있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굉장히 쌀쌀한 날씨였는데 따뜻하게 시험을 본 기억이 납니다.”



―수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신건가요?

“아닙니다. 1976년 3월1일에 평택에서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어요. 첫 발령지가 평택 송탄이었는데 새마을 업무를 봤어요. 그 당시만 해도 3공화국 시절이다보니 국가시책으로 새마을업무가 상당히 중요했거든요. 당시 부군실에서 직접 새마을 업무를 관장했을 정도니까요. 이외에도 반상회, 민방위 창설 등의 일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1979년 수원으로 전입했습니다.”



―임용했을 때 동기가 누구누구 있었나요?

“지금 다 그만뒀지만 홍승표 용인부시장, 김필경 오산부시장, 임봉재 군포부시장이 같은 55년생이니까 동기죠. 약관의 나이에 입문해서 예순이 됐으니깐 세월이 굉장히 길었던 것 같아요.”

   
 

―임용 당시와 지금의 공직사회를 비교한다면 많이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모든 게 다 변했죠.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게 빠를 것 같아요. 변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수원시가 이번에 청렴도 부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잖아요. 이번 청렴도 결과가 나오고 보니 초임 시절이 떠오르더군요. 처음 발령 받을 때가 3공화국 시절이었잖아요. 이런 표현이 적절한 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변화시키고 탈피하려면 항상 공무원 집단을 손을 댔습니다. 그 때 역시 행정풍토 쇄신, 서정쇄신이라는 머릿글을 두고 공무원들을 엄청 시달리게 했어요. 아마도 청렴도의 근본을 잡으려면 공무원들을 잡아야하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각 기관마다 청렴도 평가를 놓고 난리잖아요.”



―공직생활을 하면서 고비도 적지 않게 있을 것 같은데요. 기억나는 일은 없나요?

“처음 발령 받았을 때 총각이라는 이유로 읍사무소 숙직을 다 도맡아 했습니다. 그것도 단 2명이 번갈이 가며 했으니까 하루걸러 하루인 셈이죠.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 사직서를 품고 다녔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내 직급이 5급 을류였거든요. 지금으로 따지면 9급인데.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무엇인지, 의미도 모른 채 들어왔다보니 마냥 힘들었죠. 5~6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이 되면서 괜찮아졌어요. 처음 공직에 입문 했을 당시만 해도 관료조직 내 계급이 적립돼서 굉장히 딱딱할 때였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는 하위직들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보안, 동향, 반상회 등등. 챙겨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중 보안은 물론이고, 동향의 경우 의도적으로 만드는 동향도 스트레스 중 하나였고요. 동향 업무를 할 당시 신문의 경우 주간, 월간해서 의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동향이 아니었거든요.”



―당시에는 모두 친필로 글을 써야해서 학원까지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전부 친필을 써서 군수싸인을 받아야 했으니까 힘들었죠. 그 때는 그리는 글씨였어요. 그래서 필기하는 분한테 하루 종일 업무를 부탁해야 했습니다. 그게 싫어서 저는 평택에 있을 때 글씨 학원을 다녔을 정도예요. 동향업무가 그만큼 부담스럽고 힘들었어요. 복사기가 없는 시절이다 보니 모든걸 일일이 써야 했으니까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수원으로 전출와서는 글 좀 쓴다고 필기업무를 도맡아 했습니다.”



―평택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떻게 수원으로 오시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1979년도에 부모님이 모두 수원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평택에서 수원으로 전입했어요. 수원으로 온 지 34~35년 쯤 됩니다.”



―며칠 후면(인터뷰 당시는 1월 7일이었습니다.) 38년 동안 근무했던 공직을 떠나야 하는데요. 짧은 인터뷰 시간동안 그 심정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허허) 예전에 후배된 입장에서 퇴직하는 선배들을 보면 ‘굉장히 서운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눈물을 몰래 훔치는 선배들도 자주 봤고요.

근데 막상 퇴임사를 쓰려고 하니 가장 많이 들어간 말이 무엇이냐면 ‘정말 기분 좋다’라는 말이었어요. 퇴임식이 끝나면 집으로 가는데 얼마나 좋아요.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 싶습니다.사실 섭섭보다는 시원한 쪽이 더 커요. 아마 후배들도 이 자리 서면 저랑 같은 느낌을 받을 겁니다.”



―38년 공직에 계시면서 ‘이 부분은 내가 정말 아쉽다’, 아니면 ‘이 일은 내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상황을 총 지휘를 했던 일입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월드컵 종합상황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경기장 공사 중 문제가 생기면서 3천억 원 가량을 공사자금으로 조달해야 했어요. 주 책임이 저한테 있었고요. 하지만 수원시 여건으로는 자체조달이 어려워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요. 그렇다보니 제주 서귀포와 전주 등 타 도시와 달리 수원월드컵경기장의 경우 경기도가 지분에도 참여를 했지요. 그러다보니 월드컵 추진 포메이션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조직위에서 회의를 수집하면 지원을 해줬던 경기도 담당자가 항상 따라다녔죠. 그러면 타 지역에서 “경기도는 왜 왔느냐. 나가라”라고 하면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작업이 항상 이뤄졌어요. 당시 시장이 공석인 관계로 부시장 체제로 운영돼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모범적인 개최도시로 평가받게 돼 보람은 있었죠. 당시 큰일을 마무리짓고 나서 상급단체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 왔었으니까요. 갈등이 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남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이 가장 아쉬우면서도 뿌듯한 일인 것 같네요.”



―덕장이란 평가와 함께 업무에는 깐깐한 선배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 넘어가면서 수원 인계동장으로 근무할 때 이었어요. 당시 39세였습니다. 가장 어린나이의 사무관이 동장이 된 셈이죠. 당시부터 내 스스로가 변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관리직이다보니 일하는 스타일 자체가 달랐습니다. 마음가짐이 달랐죠. 내가 모르면 조직관리가 안됐으니까요. 내가 국장을 할 때 후배 직원들한테 당부했던 것이 “너희가 업무를 실무자만큼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60~70%은 알아야 조직관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업무를 인지해야 했고요. 너무 잘 아시겠지만 배우지 않고서는 관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지휘만 갖고서는 안됩니다.”

   
 

―그러고 보면 구청장님은 수원의 연고가 사실 전혀 없는 셈인데요.

“안그래도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들이 사무실에 잠깐 들렀었어요. 벽에 걸려 있는 제 사진을 보고 대뜸 한다는 말이 ‘김포 촌놈이 평택에서 공직을 시작해서 수원 와서 구청장까지 했으면 참 너도 성공했다’하데요. 친구들이 돌아가고 돌이켜보면 틀리는 말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이 자리까지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은 동료와 후배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가장 중요하고 내 밑에 있는 직원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윗 사람들한테 잘보이는 것은 쉽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들에게 잘해서 향후 후배들에게 평판이 좋아지면 그것 보다 행복한게 없는 것 같아요.”



―민선 2기 시절 비서실장자리에 있다가 민선 3기 출범과 동시에 구청으로 발령 받았었습니다. 일부 직원들은 이때 구청장님을 바라보면서 많이 안타까워했었던 것 같아요.

“시장이 민선일 때는 당연히 요직부서인 비서실장, 담당관 등이 썰물처럼 빠지고 새로 들어옵니다. 당시 저도 같은 경우였고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시에는 서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보는 시각 때문에 더 힘들었죠. 주변에서 어떠냐고 자꾸 물어보는게 신경이 더 쓰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시장보다는 그 밑에 중간관리자들의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에 힘들던 것 같아요.

서기관을 민선 4~5기에 달았습니다. 물론 7~8년 후배들이 서기관을 먼저 달았는데, 그때는 서운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민선이 시작된 후 공무원들의 선거와 관련된 스트레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없지 않아 있죠. 면면을 보면 전임시장 있을 때 ‘누구 라인이다’라는 식으로 분류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과거 구청장들이 지방선거에 도전한 사례가 몇 차례 있었는데요. ‘덕장’ 윤건모 구청장 역시 선거에 나갈 만한 인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말이 끝나기 전에 손 사례를 쳤다.)“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공직에 있으면서 사실 다 이뤄봤어요. 미련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공직자들에게 수원발전을 위해서 한 말씀 한다면.

“ 과거에 비서실장 업무를 수행 할 때 서울시장이 고건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시의 행정을 모델로 받는다고 하면 수원시가 유일했어요. 규모가 비슷했기 때문이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오히려 서울시에서 지금의 수원을 배우겠다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 고건시장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납니다. ‘하나를 배우겠다고 하면 둘을 주어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뜻은 뭐냐면 수원시 정도의 기초단체 규모가 되면 결과적으로 수원이 하면 나머지 200개 가량의 기초단체들이 수원을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수원시는 조만간 더 큰 규모의 광역지자체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울산보다 인구가 많아집니다. 재정규모만 봐서도 울산보다 크고요. 후배공직자들이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역량도 남다르고, 수원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수원은 아주 희망적이고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후배 공직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잘 해주길 희망합니다.”

그는 내달 수원에서 제2 인생의 막을 열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다. 덕장 윤건모가 38년 공직노하우를 어떻게 되살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지 수원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할 뿐이다.

대담=엄득호 사회부장/dha@joongboo.com

사진=강제원기자/jewon@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