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38) 양평군 참전비
Written by. 인턴기자 김선영 입력 : 2026-02-10 오후 2:22:38
지평리 전투는 1951년 중공군의 2월 공세 당시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 및 예하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 전투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 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자유수호를 위하여 지평리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의 공적을 기리고, 참전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6년 2월 14일 양평군민의 뜻을 모아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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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지평고등학교 교내에 세워진 참전비(양평군)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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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평리는 홍천-여주 축선 상에서 병참선의 중심지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모두 이곳의 점령을 작전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지평리는 인접지역의 전체 도로망의 통제가 가능하고, 한강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미 제10군단의 좌측면을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진지인 동시에, 남한강 서쪽의 광주지역에 있던 적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제23연대 전투단을 2월 3일부터 지평리에 배치하였고, 제23연대장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은 지평리 사수를 결심하고, 보유한 연대의 전력을 고려하여 마을을 중심으로 직경 1.6㎞의 원형진지를 구축하고 방어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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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전투 기념비’ 앞 미 2사단 기념비와 UN(미국)군 전승 충혼비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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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2월 13일 오후 5시 30분을 기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중공군의 공격은 14일 아침까지 계속되어, 미 제23연대의 손실은 약 100명에 달하였다. 14일 오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유엔 공군 전폭기가 진지 남쪽 망미산 일대에 집결한 적을 공격하였고,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가 3시간에 걸쳐 미 제23연대 집결지에 보급품을 투하하였다. 이에 적은 주간 공격을 단념하고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중공군은 14일 저녁 8시 30분 미 제23연대 방어진지 전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백병전으로 맞서며 공격을 저지했다. 15일 새벽 서쪽에 위치한 프랑스 대대는 인접한 진지 일부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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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전시중인 당시 지평리 전투 현장 사진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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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9군단 소속의 제5기병연대(연대장 Marcel G. Crombez 대령)가 군단장으로부터 지평리의 제23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14일 오후 5시에 남한강을 도하한 후 23시 30분에 지평면 곡수리까지 진출하였다.
제5기병연대장은 15일 오후 3시에 제6전차대대 D중대와 제70전차대대 2개 소대로 편성된 전차 23대에 제3대대 L중대원 160명을 탑승시켜 전차 종대를 구성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였다. 유엔 공군이 곡수리 북쪽과 망미산 서쪽에 대해 항공폭격을 실시하고 제5기병연대 제1·제2대대가 곡수리 양쪽 능선의 적을 견제하는 가운데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는 오후 3시 45분에 돌파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때 전차 종대의 선두와 후미간의 길이가 1,500m에 달했으며, 특수임무부대의 선두는 6㎞에 이르는 적중을 돌파해 이날 오후 5시 15분경에 지평리 남쪽의 망미산을 공격 중인 제23연대 소속의 전차와 연결하였다.
망미산에 배치된 적들은 제5기병연대의 증원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철수하였고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는 지평리의 제23연대와 연결한 후 곡수리에서 지평리에 이르는 도로를 방어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이 지평리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항공정찰 보고가 있었으며, 16일 새벽에는 중공군의 퇴각이 정찰대에 의해 확인되었다.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23연대가 중공군에 가한 손실은 총 4,946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제5기병연대도 5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반면에 제23연대의 사상자 수는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다.
4일간에 걸친 지평리 고수방어 전투는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처음으로 그들의 대규모 공세에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중공군 개입 후 최초로 유엔군의 전술적 성공사례였던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 전 부대에 자신과 희망을 주었으며, 미 정책당국에 대하여는 전세의 추이에 대한 의구심을 일소하게 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제8군사령관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작전을 추진하는 데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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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에 위치한 지평리 전투 승전비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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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한 ‘지평리 전투 승전비’가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에 2015년 8월 15일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평리 전투 승전비(1951. 2. 13.~16.)
지평리 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 전우들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과 양평군민의 온 마음을 정성껏 모아 이 승전비를 세웁니다.‘.
지평이 고향이신 아버지가 농담 삼아 했던 말 중에 ‘기브미 쪼꼬렛’이란 말이 있다. 이 동네 60~70년대 생들은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전에 이 말부터 배웠을 거라고 하신다. 영어로 ‘초코렛 주세요’란 말이란다.
얼마나 치열했고 중요한 지역인지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들이 전쟁 후에도 이곳에서 훈련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미군 병사들을 자주 볼 수 있었고 따라 다니면서 초코렛도 얻어먹었다고 한다.
‘지평리 전투’, 정말 치열했고 그 어느 전투보다 중요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이름이다. UN군 참전 미2사단과 프랑스 대대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깊이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려 본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선영
